『오디세이아』: 놀란은 왜 2700년 전 이야기를 꺼냈을까? 🏺
놀란은 왜 오디세우스를 죄인으로 만들었을까? 🏺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를 보고 나오면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분명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왔어요. 10년의 전쟁을 끝내고, 다시 10년 가까이 바다를 떠돈 끝에 마침내 이타카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아마 그게 놀란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가장 크게 바꾼 부분인지도 몰라요.
🔖 오늘은 그 차이에 책갈피를 꽂아보겠습니다.
『오디세이아』는 사실 ‘여행’보다 ‘귀환’ 이야기예요 🏠
『오디세이아』 하면 무엇부터 떠오르나요?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 사람을 돼지로 만드는 키르케,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하는 세이렌….
워낙 별별 일이 다 벌어지다 보니 흔히 거대한 모험 이야기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사실 모험을 하고 싶어서 바다를 떠도는 사람이 아니에요.
정반대입니다.
죽어라 집에 가고 싶은 사람이에요.
트로이 전쟁에서 10년을 보낸 그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해 또다시 긴 시간을 떠돕니다. 그래서 『오디세이아』의 핵심에는 고대 그리스어로 ‘귀환’을 뜻하는 노스토스(nostos)가 놓여 있어요.
그렇다면 질문은 조금 달라집니다.
사람은 떠났던 장소로 돌아가기만 하면 정말 ‘돌아온’ 걸까요?
오디세우스가 없는 동안 이타카도 변했습니다.
아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 없이 자랐고, 아내 페넬로페 곁에는 그녀와 결혼해 왕위를 차지하려는 구혼자들이 들끓습니다.
오디세우스 자신도 마찬가지예요.
떠날 때 그는 남편이자 아버지이자 왕이었지만, 돌아왔을 때는 정체를 숨긴 늙은 거지의 모습으로 자기 집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오디세이아』에서 귀환은 단순히 A에서 B로 이동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 집은 아직 내 집인가?”
“내 아들은 여전히 나를 아버지라고 부를까?”
“내 아내는 나를 알아볼까?”
하나씩 확인하며 자신이 떠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이름과 관계를 되찾는 과정에 가깝죠.
그래서 원작의 후반부에는 유독 ‘알아보기’가 반복됩니다.
누군가는 오디세우스를 알아보고, 누군가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페넬로페 역시 그가 정말 남편인지 시험해요.
『오디세이아』에서 집으로 돌아간다는 건 결국 누군가에게 다시 나로 인정받는 일인 셈입니다.
그런데 놀란은 질문을 바꿔버립니다 👀

놀란의 오디세우스도 집에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보다 조금 불편한 질문을 하나 더 붙여요.
“그런데 이 사람, 정말 집으로 돌아갈 자격이 있을까?”
놀란의 영화에서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목마를 고안해 전쟁을 끝낸 영웅인 동시에, 그 과정에서 벌어진 학살과 폭력에 깊은 죄책감을 품고 있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영화는 특히 고대 그리스의 환대 규범인 크세니아(xenia), 영화 속 표현으로는 ‘제우스의 법’을 중요한 축으로 끌어옵니다. 낯선 이를 손님으로 받아들이고, 손님 역시 주인을 해치지 않는다는 일종의 사회적 약속이에요.
문제는 트로이 목마입니다.
선물처럼 보이는 목마 안에 병사들을 숨겨 도시로 침입한다는 발상은, 놀란의 영화에서는 이 ‘환대의 법’을 파괴한 사건으로 해석됩니다.
손님을 믿어도 된다는 세계의 약속을 오디세우스가 먼저 깨뜨린 셈이죠.
그리고 놀란은 이후의 여정을 그 죄가 되돌아오는 과정처럼 배치합니다.
오디세우스 일행을 잡아먹는 키클롭스도 환대를 지키지 않고, 키르케 역시 낯선 자들을 경계합니다. 그가 고향에 도착했을 때는 자기 집의 구혼자들마저 손님의 지위를 악용하고 있고요. 영화 속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전쟁에서 저지른 일이 자신이 돌아가야 할 세계까지 망가뜨렸다고 느낍니다.
여기서 호메로스와 놀란 사이에 꽤 큰 틈이 생깁니다.
호메로스의 질문이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라면,
놀란의 질문은 “돌아갈 집을 스스로 망가뜨린 사람도 돌아갈 수 있는가?”에 가까워져요.
같은 ‘귀환’인데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키클롭스도 조금 달라졌습니다 👁️
이 차이는 작은 장면에서도 보여요.
원작에서 오디세우스의 가장 유명한 특징 중 하나는 말과 꾀입니다.
키클롭스 폴리페모스에게 이름을 묻자 “아무도 아니다”라고 속이고, 그를 눈멀게 한 뒤 다른 키클롭스들이 달려왔을 때 “아무도가 나를 공격했다”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만들어 탈출하죠. 원작 9권에 등장하는 유명한 언어유희입니다.

그런데 놀란은 이 장면을 영화에서 아예 뺐습니다.
본인도 이 농담을 살려보려 했지만 영화에서는 영리하거나 재미있게 작동하지 않았다고 설명했어요.
별것 아닌 각색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차이가 꽤 재미있어요.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는 때때로 우습고, 허풍도 떨고, 거짓말을 하고, 말재주로 위기를 빠져나가는 변덕스럽고 영리한 인간입니다.
반면 놀란은 이런 유머와 장난기를 상당 부분 덜어내고 오디세우스를 전쟁의 기억에 짓눌린 현대적인 인간으로 옮겨놓았습니다. 실제로 고전 번역가와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영화가 원작의 유머와 향락성, 오디세우스의 복잡한 성격을 줄이고 훨씬 진지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힌 인물로 재구성했다는 평가가 나왔고요.
그러니까 놀란은 고대의 영웅을 그대로 데려온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의 상처를 다시 만든 거예요.
가장 결정적인 건 ‘집에 도착한 다음’입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결말에서 가장 선명해집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이타카는 결국 되찾아야 할 세계입니다.
오디세우스는 구혼자들을 죽이고 자신의 자리를 되찾습니다. 혼란 끝에 다시 왕·남편·아버지라는 위치로 귀환하는 거죠.
하지만 놀란은 여기서 한 번 더 비틀어요.
영화에서 오디세우스는 구혼자들을 죽인 뒤 이타카를 떠나야 하는 사람이 됩니다. 텔레마코스가 왕위를 이어받고,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와 다시 배에 오릅니다.
10년 동안 집에 가려고 바다를 헤맨 사람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떠나는 겁니다.
잔인한 변화죠.
그런데 동시에 이 각색이 놀란의 『오디세이』를 설명하는 핵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귀환은 너무 늦게 도착합니다.
장소는 그대로 있어도 내가 달라졌거나, 내가 돌아오는 동안 그곳이 변했거나, 혹은 내가 저지른 일 때문에 더 이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놀란의 〈오디세이〉에서 이타카는 여행의 마침표라기보다 하나의 확인에 가깝습니다.
“내가 그리워했던 세계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디세우스는 다시 바다로 나갑니다.
2700년 된 이야기를 굳이 다시 만드는 이유

여기까지 오면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왜 하필 지금 『오디세이아』였을까요?
저는 오히려 원작과 영화가 다르기 때문에 그 답을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고전이 계속 살아남는 건 매번 같은 의미를 전달해서가 아닐 테니까요.
호메로스 시대의 사람들에게 오디세우스는 수많은 고난을 뚫고 자신의 집과 지위를 되찾는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2026년의 놀란은 같은 남자를 보면서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을 발견합니다.
2700년 동안 책은 그대로 있었는데,
읽는 사람이 달라진 거예요.
어쩌면 고전이라는 건 오래된 답을 보관하는 책이 아니라 시대가 바뀔 때마다 전혀 다른 질문을 받아낼 수 있는 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이에요. 이번에는 책에서 시작해볼게요 🔖
저도 예전에 뉴닉에서 글을 쓸 때는 주로 영화를 이야기했습니다.
그 사이 조금 다른 곳으로 이동했어요. 지금은 홀로 출판사를 운영하며 책을 만들고, 소설을 쓰고, 예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문장 속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온 첫 글에서 『오디세이아』를 고른 건 어쩌면 꽤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영화를 이야기하다가 책으로 왔는데,
첫 번째로 펼친 책부터 ‘돌아간다는 건 무엇인가’, 즉 귀환과 복귀를 묻고 있으니까요.
앞으로 〈오블리크의 책갈피〉에서는 이렇게 한 권의 책에 잠깐 책갈피를 꽂아보려고 합니다.
유명해서 안다고 생각했던 책도 다시 펼쳐보고, 그 안에서 지금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을 하나씩 꺼내보면서요.
책은 어렵지 않게, 생각은 얕지 않게.
오늘은 마지막으로 이것만 남겨두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