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하는 저녁> | 이별에도 시작과 끝이 있다
작성자 신록
이야기는 위대하다📖
<낙하하는 저녁> | 이별에도 시작과 끝이 있다

사랑과 이별은 많은 이야기의 단골 소재이지만, 오로지 ‘이별’만을 자세히 다룬 작품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이별은 보통 작품의 후반부에 연인의 비극적인 결말로 제시됩니다. 사랑의 연장선 상에 존재하며, 이야기의 엔딩이 ’해피‘일지 ’새드‘일지를 결정짓는 최후의 갈림길 역할을 하죠.
오늘은 독특하게도 이별이 ‘엔딩’이 아니라 ‘오프닝’인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 받은 리카의 15개월에 걸친 실연을 담은 이야기, 에쿠니 가오리의 <낙하하는 저녁>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_
작가 에쿠니 가오리✍🏻 : 일본 소설가로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의 작가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특유의 세련되고 감성적인 우유체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해요.
(우유체: 온건하고 부드러운 문장으로 이루어진 문체 ↔️강건체)
막장 중의 막장?😮: 종종 너무 뜬금 없는 전개가 아닌가 싶을 수 있지만, 작가의 담백한 문장들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따라가게 될 거예요. 막장 요소보다는 인물들의 관계와 감정의 변화에 초점을 두고 읽어보아요.
🌳내용 톺아보기
📌이별의 시작 : 이사
나 이사할까 봐.
8년 동안 사귀었던 연인 다케오는 리카와의 관계를 갑작스레 종결합니다. 이 책에서 ’이사‘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떠나는 것, 관계의 변화를 뜻해요. 연인이었던 둘은 이별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것이죠. 그렇게 함께 살던 집에 홀로 남겨진 리카에게 뜻밖의 손님, 하나코가 찾아옵니다. 하나코는 다케오가 호감을 갖게 된 여자, 즉 이별의 원인이었으므로 리카는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녀를 집으로 들였고, 엉겁결에 같이 살게 됩니다.
📌이별의 과정 : 하나코
리카는 자연스럽게 하나코를 받아들입니다. 하나코에게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자신에게 남은 다케오와의 연결고리는 하나코 뿐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한편, 하나코는 말 그대로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유부남과 불건전한 만남을 갖기도 하고, 마음이 내킬 때 어디로든 훌쩍 떠났다가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리카는 하나코가 그리 싫지 않았죠. 그녀가 떠나면 약간의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고, 매사 여유롭고 나른한 태도로 일관하는 하나코와 함께하며 다케오의 부재에 익숙해집니다.
다케오가 집을 방문할 예정이라는 말을 들은 어느 날, 리카는 그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말을 들은 하나코는 그녀에게 함께 도망가자고 제안하고, 그녀는 처음으로 다케오로부터 도망칩니다.
‘도망’이라는 단어는 하나코의 성격을 잘 표현해줍니다. 하나코는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계속 눈앞의 상황으로부터 도망쳐 왔어요. 늘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녀에게도 나름의 고통이 있었다는 것이 이 장면에서 드러납니다. 후에 하나코는 자살을 택하는데요. 자살이 결국 하나코의 본질인 ‘도망’의 결말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나코라는 인물이 왜 등장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저는 리카의 실연에 있어서 꼭 필요한 존재였다고 생각합니다. 다케오와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리카에게 하나코 특유의 자유로운 모습은 긍정적인 자극이 되지 않았을까요.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고 때로는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소설 속에서 하나코와 도망쳤을 때 리카가 처음에는 불안해하지만, 점점 이를 즐기며 평온해지고 해방감을 느끼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별의 끝 : ‘낙하하는 저녁 ’
리카는 하나코가 자살했다는 소식에 놀랐으나 시간이 지나며 그 사실에 익숙해집니다. 자신의 생활에 안정을 되찾아가죠. 소설의 끝자락, 리카는 집에서 문득 하나코를 떠올리다가 죽은 그녀를 애도하는 것의 일환으로 다케오를 찾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책의 제목처럼 저녁이라는 시간에 주목해 보았어요.
리카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했을 때부터, 다케오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와 그를 만나고 함께 걸을 때까지 시간은 흘러가고, 저녁도 점점 깊어갑니다. 다케오와 육체적 관계를 가진 뒤 그녀는 허탈함과 자유를 느끼고, ’나 이사할까 봐‘라고 그에게 말하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저녁은 리카에게 이별이 진행되는(미련과 집착으로 고통받는) 시간이자, 관계에 대해 냉철하게 사유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야기 속에서 저녁과 밤이 찾아올 때마다 연극에서 무대의 불이 꺼지는 순간을 떠올렸는데요. ‘낙하하는 저녁’이라는 제목에서 ’무대의 막이 내린다‘는 표현이 연상되었던 것 같아요. 무대에 어둠이 찾아올 때마다 한 단락씩 이야기가 진전되듯이, 리카도 밤이 지날 때마다 한 단계씩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리카가 다케오에게 이사하겠다는 말을 할 때의 배경이 완연한 밤이었다는 사실은 이별이라는 연극에 마지막 어둠이 내린 것을 의미하는게 아닐까요?

🍃마무리하며
에쿠니 가오리 작가 특유의 문체 때문인지 소설이 아니라 아주 긴 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전체적으로 잔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라, 내용이 다소 파격적이고 생각할 점이 많음에도 문장 자체는 쉽게 읽히는 책입니다.
<낙하하는 저녁>에는 알 수 없는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음식이 무슨 맛인지 모르겠을 때 한 스푼 더 먹어보듯이, 작가가 이런 설정을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지를 생각하면서 문장들을 곱씹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읽고 나서도 여운이 많이 남았고, 책에 대해 이것저것 더 찾아보았던 것 같습니다. 책에 대한 여러분들의 해석이 있다면 공유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럼 오늘의 기록은 이만 마무리하고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