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비영업인 본부장이 왔다
"이 거래처는 작년 대비 30% 상승으로 잡으셨네요. 어떤 근거로 도출하셨나요?"
"그동안의 방문과 영업적인 감각을 숫자로 표현했습니다."
자신 있게 답했다. 다이어리를 펼쳐 거래처 페이지를 보여드리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이곳은 영업 기록상 방문 수와 미팅 내용이 다소 부족하던데, 수치는 상당히 높네요."
본부장이 모니터를 돌렸다. CRM 화면이었다. 그 거래처의 방문 기록이 비어 있었다. 분명히 갔던 곳이었다. 갔던 게 분명한데, 기록이 없었다.
"가장 긍정적으로 본 수치이며, 영업적인 감으로…"
"그 감이 자료에는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확인할 수 있죠?"
다이어리 위에 손을 올려놨다. 어디를 짚으려던 건지 잊어버렸다. 본부장은 화를 내지 않았다. 목소리도 높이지 않았다. 그냥 모니터를 보면서, 펜으로 종이 위 어딘가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을 뿐이다.
"이 수치를 달성하려면 타 부서 협조가 필요한 부분이 있을까요?"
"…네, 고민해서 가져오겠습니다."
침을 삼키려는데 목 안쪽이 따끔했다. 본부장의 눈을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았다. 모니터를 보거나, 다이어리 모서리를 보거나, 책상 위 종이컵을 봤다. 며칠 전까지 무시했던 사람 앞에서, 변명하다 혼나는 아이로 쪼그라든 것 같았다. 펜이 한 번 더 종이를 두드렸다. 톡. 회의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났다. 복도는 비어 있었다. 양손에 든 노트북과 인쇄물 다발이 갑자기 무거웠다.
화장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변기 앞에 서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옷매무새도 다 풀지 못한 채로 칸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변기 위에 그대로 앉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한참을 앉아 있었다.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가 지나갔지만 어느 것도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감각만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는 모르겠는.
본부장이 새로 왔을 때, 몇몇 동료는 회사 앞 김치찌개 집에 모였다. 영업본부장 자리에 비영업 출신이 앉는다는 통보가 떨어진 날이었다. 반찬이 올라오기도 전에 이야기가 시작됐다.
"현장 모르는 사람이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위에서 그냥 한 번 흔들어보려는 거지."
"숫자만 보겠지 뭐. 두고 봐, 6개월 안에 사고 한 번 터진다."
옆자리 선배가 웃으면서 "너무 흥분하지 마"라고 했다. 그 말이 또 묘하게 기분 나빴다. 찌개가 식는 동안, 우리는 계속 누군가의 흉을 봤다. 본부장의 첫 회의 공지 메일이 온 건 그 다음 주 월요일이었다.
"각 영업 담당자는 이번 분기 목표 수치와 그 산출 근거를 정리하여 1:1 미팅 시 가져와 주시기 바랍니다."
목표 수치. 산출 근거. 그 두 단어가 이상하게 오래 시야에 머물렀다.
미팅 전날 밤, 노트북을 켜놓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엑셀을 열어 거래처 리스트를 띄웠다. 작년 실적 옆에 올해 목표 숫자를 적었다. 120. 그 옆 칸이 비어 있었다. 산출 근거.
커서가 깜빡였다. 이런 걸 왜 시키는 거지. 영업이 한 줄로 정리된다고 생각하나. 감히 한 마디로. 감히 숫자로. 거래처 한 곳마다 오간 대화가 몇 시간인데, 그게 셀 한 칸에 들어갈 일인가.
'영업적인 감', 이라고 한 글자씩 쳐봤다. 누가 볼까 얼른 지웠다.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앞에 섰다. 물 한 잔을 따라 마셨다. 핸드폰을 들었다가 내려놨다.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빈칸은 그대로였다. 결국 파일을 그냥 닫았다. 닫으면서 생각했다. "이 정도면 됐어. 직접 만나면 다 설명할 수 있어. 나는 현장을 아니까."
화장실 칸에서 한참 앉아 있다가 자리로 돌아왔을 때, 정신이 드는 데 다시 시간이 걸렸다. 모니터를 켰다가 그냥 멍하니 화면을 봤다. 옆자리 선배가 슬쩍 물었던 것 같기도 한데,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보니 사무실이 어두웠다. 다 퇴근하고 아무도 없었다. 형광등 한 줄만 내 자리 위에서 켜져 있었다. 그제서야 어젯밤의 그 엑셀 파일을 다시 열었다. 빈칸이었던 셀에 커서를 올렸다. 전년도 실적이 100이었다면, 120 중에 90까지는 어디서 나올 수 있을까. 90% 이상 확실한 거래처. 70% 정도로 흔들리는 곳. 아직 가능성 단계인 곳. 한 줄씩 분리해서 적기 시작했다.
거래처 한 곳마다 방문 일지를 다시 펼쳤다. 어떤 곳은 미팅 기록이 한 줄도 없었다. 그동안 내가 "감으로 안다"고 믿었던 거래처들. 그 감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정작 기록에는 흔적이 없었다. 본부장의 펜 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톡, 톡. 이번에는 종이 위가 아니라 빈 셀 위였다.
손가락이 잠깐 멈췄다. 화면 안에서 채워야 할 빈칸이 몇 개인지 천천히 세어봤다. 한 줄, 두 줄, 세 줄. 거래처 수만큼 빈칸이 있었다. 한 거래처에서 손이 멈췄다. 작년 매출이 가장 컸던 곳이었다. 방문 기록 칸이 비어 있었다. 분명히 갔다. 그런데 무엇을 하고 왔는지, 어떤 약속을 했는지, 왜 그곳이 우리를 계속 선택해줬는지, 한 줄도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회의실에서 다이어리 위에 손을 올렸을 때의 감각이 다시 올라왔다. 입이 마르던 그 느낌. 뭐라도 짚어 보이고 싶은데 짚을 게 없던 그 손가락. CRM을 열었다. 빈 항목에 그날 기억나는 대화를 한 줄씩 적기 시작했다. 정확하지 않아도 됐다. 일단 무언가가 그 칸에 있어야 했다. 다 퇴근한 늦은 저녁 사무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다음 이야기.
👉 12) 사수없이 영업을 시작했던 첫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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