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미술관만 가요?
작성자 김진혁
언제까지 미술관만 가요?
미술 작품을 볼 수 있는 장소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어디인가요? 아마도 미술관이겠죠! 그럼, 미술관 말고 떠오르는 장소도 있나요?
✓ 어떤 곳이 있을까?
오늘날 미술 작품을 볼 수 있는 장소는 미술관 외에도 많답니다. 갤러리, 비엔날레, 아트페어, 공공미술, 대안공간, 복합문화공간 등 벌써 6곳이나 더 있네요. 다양한 곳 중에서도 이번엔 신생공간을 알아볼게요.
#1. 대안공간 그리고 신생공간
신생공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안공간이란 개념을 먼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대안공간의 역사는 1970년대 뉴욕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작가로 활동 중이던 제프리 류(Jeffery Lew)가 뉴욕 소호에 있던 자신의 건물 일부를 동료 작가들과 공유했습니다. 예술가들은 이곳을 거점 삼아 자연스럽게 교류하며 작업하고, 미술관 안에서 보여줄 수 없던 작품들을 전시하기도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뉴욕타임스가 이 장면을 포착하고 기사를 내면서 기존과는 다른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제도권 밖의 대안(alternative)이 될 수 있는 장소였죠.
이후, 한국에 대안공간이 자리 잡게 된 건 1990년대 후반입니다. 당시 유학 중이던 예술 학도들이 돌아와 보니 아직 국내에는 퍼포먼스를 비롯하여 다양한 매체의 실험 예술을 전시할 기회가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이들 중 몇몇이 합심하여 1999년 홍대에 ‘대안공간 루프’를 열었고, 2024년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어요.
그런데, 기관과 제도가 모두 품을 수 없는 예술을 위한 대안으로 오픈된 대안공간도 한계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3가지 정도로 정리해 보죠.
신진작가의 제도권 진입을 위한 등용문에 그치는 현상을 간과할 수 없다.
초기 대안공간에서만 볼 수 있었던 실험 예술을 미술관이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차별점이 흐려졌다.
경영 측면에서 지속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게 되며 공공기금 의존성은 점점 커지게 되고, 결국 제도권 편입은 불가피한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니 예술인들은 또다시 대안의 대안을 생각하게 됩니다. 보통 대안공간은 상업성을 추구하지 않는 비영리 성격으로 운영됐는데요. 새로 생긴 공간들은 경영상 지속가능성을 위해 일부 상업성을 띠기도 하고요. 아트페어에 참가하기도 하고요. 최근에는 상업 브랜드와 협업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국내에 처음 대안공간이 등장했던 때의 정체성과는 달라지고 넓어진 ‘신생공간’으로 불리곤 해요. 이런 신생공간들은 재개발 지역, 아주 오래된 건물의 옥상, 가게 안의 가게, 더는 운영되지 않는 당구장, 목욕탕, 우체국 등에서 재탄생되곤 합니다.
#2. 빌딩 꼭대기에서 그림이 쏟아지다
이제 직접 신생공간에 가보죠. 약수역 10번 출구로 나와 5분 정도 걸으면 시선을 사로잡는 빌딩이 하나 있습니다. 요즘 빌딩과는 확실히 다르게 생겼거든요. 외관은 붉은 벽돌이 쌓여있고, 빌딩명이 적힌 글씨는 굴림체의 끝만 뾰족하게 만든 듯 조금 촌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빌딩 3층에는 가장 최신의, 동시대 미술 작품이 있습니다. 마침 윤향로 작가의 «미래 Mirae» 전시가 한창이었어요.
✓ 여기서 잠깐
약수역 미래 빌딩(*서울 중구 동호로15길 43)은 1968년에 준공하였으며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지하 1층에는 와일드덕이란 브런치 카페가, 지상 1층과 2층은 로우클래식이란 패션 브랜드의 쇼룸으로, 3층을 전시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전시도 보고, 옷 구경도 하고, 커피까지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답니다.
전시 작품들은 회화이고, 특정한 대상을 그리지 않은 추상화입니다. 어두운 먹색을 바탕으로 검정, 하얀 점들이 전체적으로 퍼져있고요. 간간이 아주 새파란 점들도 보입니다. 어떤 부분은 점들이 모여 선과 면을 이루기도 했네요. 마치 은하수 풍경 같기도 하고, 우주의 일부분처럼 신비롭고 시공간을 이동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리하여 과거와 미래를 오갈 수 있는 일시적 포털(portal) 같기도 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가 있어요!
이것들이 모두 천장에만 설치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고개를 쳐들거나, 누운 자세로만 똑바로 볼 수 있죠. 전시장 한편에는 누울 수 있는 빈백(beanbag)도 있고요.
처음엔 고개만 들어 보다가, 풀썩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천장을 맵핑(mapping)하듯 촘촘히 작품을 배치하여 온통 그림뿐입니다. 오직 이 공간의 하늘만 우주가 되었어요.
잠시 긴장을 놓은 채로 작품과 새로 태어난 이 공간을 함께 느껴봅니다. 겉으로 봤을 땐 그저 과거의 건물일 텐데, 그 안에는 미래를 향하는 예술 세계가 펼쳐져 있다니, 그리고 그 세계를 직접 마주하는 기분은 참 묘하고 흥미롭습니다.
#3. 신생공간, 이 코스대로 가세요
• 한남동
페이스갤러리는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다국적 기업형 갤러리에요. ‘다국적 기업형’이란 말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스타벅스나 맥도날드를 떠올려보세요. 이렇게 여러 나라에 진출하여 사업을 하듯 갤러리를 여러 국가에 진출시켜 운영하는 것을 말합니다.
대안공간이나 신생공간과는 상반된 지점에 놓인 곳이지만, 글로벌 미술 시장의 트렌드를 파악할 수 있는 갤러리니 한 번 들러보시길 바라요.
아마도예술공간은 2013년부터 한남동에서 지속되어온 전시공간이에요. 이곳은 계속 얘기했던 대안공간과 신생공간의 정체성에 가까운 곳입니다. 3층 구조의 주택으로 외관은 여전히 집의 형태이고, 내부는 전시장에 걸맞게 개조했는데요. 매년 실험적인 전시와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저는 2023년에 단편 영화 만들기 워크숍에 참여해서 작품을 완성하고, 상영회도 열었었어요. ‘영상’이란 매체에 대해 더 깊게 고민해볼 수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신생공간이 생기는 지역엔 매력적인 카페들도 꼭 붙어있어요. 엔트러사이트는 넓어서 노트북 하기도 편하고,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고요.
울프소셜클럽은 사람 많은 한남동에서 작고 조용한 공간을 찾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여기 모히또가 정말 맛있었어요!
• 을지로
을지로는 많은 대안공간이자 신생공간이 모여있는 지역이에요. 그중에서도 직접 2번 이상 방문했던 곳들을 추천해봅니다. 을지로 공간들의 특징은 정말 찾기 어렵다는 거예요. 아주 좁은 골목에 있거나, 철근 절단처럼 묵직한 작업을 하고 있는 어르신들 사이를 지나가야 할 때도 있거든요. 아주 작은 간판이라도 꼼꼼하게 확인하며 다니고, 주변 상인 분들께 직접 여쭙는 것도 길을 잃지 않는 방법입니다.
백두강산 카페는 옛날 다방 느낌이 나는데, 그게 또 세련되어 종종 가고요. 비엔나 커피가 맛있습니다. 필요의방은 나만의 아지트같은 포근한 느낌이에요. 필터 커피들 전부 맛있습니다.
서울 밖으로 간다면, 각 지역 미술관과 함께 신생공간도 하나쯤 방문해 보시면 잊을 수 없는 여행이 될 거예요. 광주는 예술공간집, 대구에 간다면 모호주택, 부산에선 오픈스페이스배를 추천합니다. 신생공간들은 보통 큰 도로보다는 작은 골목에 있고, 과거보다 사람의 발길이 줄어든 곳에 위치한 경우가 많아요. 자본의 이동과 부동산 흐름 때문이겠죠.
그래서 신생공간을 쫓다 보면 동네의 서사를 느끼기도 한답니다. 미술관과는 또 다른 얼굴을 가진 다양한 신생공간들, 2025년부터는 하나씩 방문해 보면 어떨까요!
*참조: <1970년대 미술의 확장과 대안공간: 112 Greene Street, The Kitchen, Artists Space를 중심으로> 이임수(한국예술종합학교 2014), Art in Culture 2019년 5월호 대안공간루프 양지윤 디렉터 인터뷰
김진혁
동시대 미술 안팎에서 기획하고 연구하며 글을 쓰고 있다. 뮤지엄 학예팀을 시작으로 갤러리, 복합문화공간과 신생공간 등 다양한 현장에서 예술에 관한 유무형의 것을 만들어왔다. 과거에는 영양학을, 현재는 미술사를 공부하며 동시대 미술 안에서 식이와 신체를 다루는 방식을 좇는다. 웹진이자 플랫폼 실험으로써 큐레이터의사생활(@magazine.curator)를 운영하며 전반적인 예술 생태계를 관찰하는 데에도 흥미를 둔다. 저서에는 『미술관을 좋아하게 될 당신에게(2023)』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