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틀몬스터 성수 신사옥과 브루탈리즘 건축 다시 읽기 🏢
작성자 고슴이의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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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틀몬스터 성수 신사옥과 브루탈리즘 건축 다시 읽기 🏢

요즘 서울 성수동에 모습을 드러낸 젠틀몬스터 신사옥이 엄청난 화제를 몰고 있어요. 제 주변에 나이 지긋한 분들까지 그 요상한 건물은 대체 뭐냐고 물어보실 정도입니다.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한 육중한 모습 때문인지, ‘브루탈리즘의 귀환’, ‘네오 브루탈리즘’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어요. 흔히 브루탈리즘을 두고 ‘무뚝뚝한 콘크리트 덩어리’, ‘도시의 흉물’이란 표현을 쓰곤 하는데요. 한때 전 세계에서 열렬히 추앙받던 브루탈리즘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억울할 만합니다. 이 글을 기회 삼아 브루탈리즘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을 살펴볼까 해요.

이름은 수상하지만, 정신은 맑아요: 브루탈리즘의 의미와 유래

‘브루탈리즘(Brutalism)’은 이름부터 오해를 사기 딱 좋아요. 세상에, ‘잔혹한(brutal)’ 건축이라니요. 그런데 이 용어는 사실 전설적인 거장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로부터 유래했답니다. 1952년 프랑스 마르세유에 고층 집합 주택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e d’Habitation)’을 완공할 때 콘크리트 표면을 따로 칠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면서 ‘베통 브뤼(béton brut)’라고 표현했거든요. 한국어로 번역하면 ‘날 것 그대로의 콘크리트’란 뜻인데요. 영어로 ‘날 것’을 의미하는 ‘raw’에 대응하는 프랑스어 ‘브뤼’가 바다 건너 옆나라 영국의 건축가 부부 앨리슨 스미스슨(Alison Smithson)과 피터 스미스슨(Peter Smithson)을 통해 건축 어휘로 새롭게 태어난 결과가 바로 브루탈리즘입니다.
그들은 기존 모더니즘 건축이 비인간적이고, 솔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초기 모더니즘이 효율성과 기능을 최우선으로 삼다 보니 그에 따른 기계적인 면모가 인간성을 존중하지 않고, 1920년대에 등장한 ‘국제주의 양식(International Style)’에서 활발히 사용하는 유리 커튼월(curtain wall)이 실은 빈약한 내부를 가리기 위해 건물 표면을 얄팍한 유리로 감싸는 행위라는 이유 때문이었죠.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도시의 복구가 긴급히 필요한 상황에서 스미스슨 부부는 건축의 허례허식을 과감히 없애고, 사람들 간의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역설했어요.
그래서 건물의 뼈대와 속살을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노출하는 방식이야말로 건축가의 윤리적 정직함과 직결된다고 믿었답니다. 특히 세금으로 짓는 공공 건축물에서 재료와 구조를 정직하게 다루는 일은 평등, 도덕성, 신뢰감, 민주주의를 건축으로 표현하는 것과 다름없었어요. 이렇게 초기 브루탈리즘은 (놀랍게도) 스타일보다는,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향한 건축 사상이자 태도에 가까웠어요.
평등과 공공의 이름으로: 브루탈리즘이 인기를 끈 이유

1960년대, 그리고 1970년대 중반까지 브루탈리즘은 그야말로 건축계의 ‘글로벌 스탠다드’였습니다. 전후 폐허를 복구하고, 복지 사회를 추구하고, 평등을 열망하는 전 세계 여러 곳―유라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을 망라하는―에서 브루탈리즘은 이념과 체제를 넘어 추앙받았습니다. 공산주의를 표방하며 서구와 대립하던 소비에트 연방(소련)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입됐어요. 특정 건축 사조가 이렇게 광범위한 지역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모은 사례는 무척 희귀한데요. 그 비밀은 브루탈리즘이 공공성과 현대성을 구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건축 언어로 꼽혔기 때문입니다. 재료와 구조를 정직하고 명료하게 노출하는 브루탈리즘이야말로 과거의 권위주의적인(혹은 부르주아적인) 화려한 장식과 결별하고,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공공 공간을 구현할 적임이라고 다들 믿어 의심치 않았거든요.
지금 보면 무뚝뚝하고 반복적이고 다소 위압적인 브루탈리즘 건축물의 모습은 당시만 하더라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공평함, 동등하고 평등한 기회, 신뢰감 있는 공공 서비스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어요. 그래서 대학 캠퍼스, 시청, 도서관, 미술관, 병원, 사회주택(임대주택) 등 공공시설이라면 경계를 가리지 않고 폭넓게 애용됐죠. 건축 기술의 급격한 발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더욱더 저렴하고 정밀하고 안전하고 시원시원하고 모험적인 콘크리트 건축이 가능해지면서 건축가들은 도시 한가운데에 초대형 조각을 만드는 기분으로 조형적인 실험을 거듭할 수 있었어요. 나중에는 기념비적인 건축물로 진화하기도 했는데요. 소비에트 연방에서 특히 영민하게 활용했죠.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브루탈리즘의 몰락

달이 차면 기우는 게 만물의 법칙이라지만, 브루탈리즘의 몰락은 급작스럽고 또한 처절했습니다. 직접적인 계기는 1973년 세계를 강타한 제1차 석유파동이었습니다. 브루탈리즘이 추앙받던 유럽과 북미 경제에 곡소리가 울렸죠. 정부는 지출을 줄여야 했고, 공공 건축 발주는 일제히 멈췄습니다. 석유값이 폭등한 비상시국에 에너지 효율이 낮아 보이는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은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어요. 사실 더 큰 문제는 공공기관의 비용 감축으로 인한 관리의 부재였습니다. 노출 콘크리트의 특성상 유지와 보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쉽게 낡고, 더러워지고, 급속도로 황량해지는데요. 이렇게 몇 년간 유지 보수 없이 방치하니 어느새 도시의 흉물로 손가락질받는 상황이 찾아왔습니다.
게다가 몇몇 사회주택 프로젝트에서 범죄율이 높아지면서 슬럼화가 진행되자, 브루탈리즘의 시작점이었던 ‘사회적 건축’에 실패 딱지가 붙었어요. 건축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브루탈리즘의 믿음에 근본적인 의구심이 생긴 거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브루탈리즘을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득세와 1979년 찾아온 제2차 석유파동은 브루탈리즘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놨습니다. 곳곳에서 철거 요구가 빗발치고, 실제 많은 건물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어요.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독립한 나라들에서는 과거 세워진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유지 관리할 여력이 없어서 모두 폐허로 변했습니다. 흡사 디스토피아를 방불케 했죠.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브루탈리즘이란 건축 영웅은 어느새 모두가 잊고 싶은 치부가 되었습니다.
소셜미디어가 소환한 ‘쿨한’ 건축: 브루탈리즘의 부활?

그렇게 물리적인 세상과 사람들의 기억에서 빠르게 사라지던 브루탈리즘은 21세기 들어 갑자기 호출됩니다. 거의 강제 소환급인데요. 예상하다시피 이번에도 소셜미디어가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세련되고 깔끔하고 반짝이는 건축물에 익숙하던 젊은 세대에게 거칠고 황폐하고 질감이 살아있는 콘크리트 덩어리는 기대를 뛰어넘는 매혹, 그 자체였습니다. 게다가 조형적으로 명확하고, 세월의 흔적까지 스며든 건물은 쿨한 감성을 극대화하는 사진발까지 완벽했죠. 소셜미디어가 촉발한 젊은 세대의 꾸준한 관심 때문에 ‘브루탈리즘이 돌아온다’라는 기사까지 나올 정도였어요.
그러나 브루탈리즘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브루탈리즘의 조형적 특징인 정직한 재료, 구조의 노출, 텍스처 등을 차용한 브루탈리즘 스타일이 현대적 감각, 발전된 기술과 만나 세상 곳곳에 출몰하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젠틀몬스터 신사옥은 확실히 동시대 건물에서 찾아보기 힘든 브루탈리즘 맛이 나요. 완만한 곡면의 덩어리감이 돋보이는 하층부, 일사불란하게 밖으로 튀어나온 직선적인 구조체로 뒤덮인 중층부,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거대한 전망대처럼 튀어나온 상층부로 이루어진 노출 콘크리트 건물은 말 그대로 도시에 솟아오른 웅장한 콘크리트 조각처럼 보이니까요.
하지만 과거 브루탈리즘의 앞마당이었던 공공 건축이 아니라, 민간 건축에서 브루탈리즘 스타일이 쏟아져나오는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브루탈리즘 스타일의 건물이 유행하는 근래의 상황은 브루탈리즘의 부활이라기보다는 상업적인 논리에 맞춰 그 이미지와 물성을 소비하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 브루탈리즘 스타일의 건축물 또한 그런 지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해요. 다만 대지와 건물의 목적에 맞게 합리적으로 설계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산물이라면, 무분별하게 외면만 차용해 스멀스멀 등장하는 유행품과 바로 구별되겠죠.
그러니 브루탈리즘 스타일에 대해 마냥 폄하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환영해야 할지도 몰라요. 50년 전 브루탈리즘이 중시하던 공공성과 사회적 건축, 공동체 의식은 현시대의 건축에서 더욱더 중요해지고 있거든요. 과거를 반면교사로 삼아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 우리에게 브루탈리즘의 가치와 그 생명력은 계속 유효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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