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트렌드를 만드는 여자들 2️⃣: '서브스턴스' 돌풍을 만든 기획자, ‘찬란’ 이지혜 대표
작성자 고슴이의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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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트렌드를 만드는 여자들 2️⃣: '서브스턴스' 돌풍을 만든 기획자, ‘찬란’ 이지혜 대표

‘역대급 미친 영화’. 얼마 전 50만 관객을 넘긴 영화 ‘서브스턴스’에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예요. 바디 호러라는 마이너한 장르에다, 대형 배급사를 끼지 않고 개봉한 영화인데도 엄청난 수의 관객을 모아서 “아트영화의 역사를 새로 썼어!” 하는 말까지 나왔는데요. 그런데 그거 알고 있나요? 이 ‘서브스턴스’ 돌풍을 가능하게 한 기획자가 따로 있었다는 것. 바로 영화 수입배급사 ‘찬란’의 이지혜 대표님이에요.
2010년 설립된 ‘찬란’은 영화를 사랑하는 시네필이라면 무조건 들어봤을 만한 작품을 수입·배급해 왔는데요. ‘유전’과 ‘미드소마’,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 ‘사랑은 낙엽을 타고’, ‘존 오브 인터레스트’, ‘악마와의 토크쇼’, 그리고 최근의 ‘서브스턴스’까지, 주제·형식 면에서 모두 흥미로운 작품들을 국내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일을 꾸준히 해온 거예요. 그 중심에는 여성 기획자이자 ‘찬란’의 대표인 지혜 님이 있었고요.
영화 배급 일을 시작한 지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지혜 님은 지금도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자신의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말하는데요. ‘좋은 영화’와 ‘돈 되는 영화’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는 일의 어려움과 사랑하는 일을 지치지 않고 계속해 나가는 데 필요한 것에 대한 이야기, ‘찬란’의 대표가 생각하는 우리나라 아트영화 시장의 미래까지, 지혜 님의 이야기를 함께 따라가 봐요.
“이 영화 정말 미치도록 재밌다!”: 50만 아트영화 ‘서브스턴스’의 배급사, ‘찬란’
Q. 안녕하세요, 대표님. 비트 구독자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찬란’이라는 영화 수입배급사를 2010년부터 15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는 이지혜라고 합니다. 아마 최근 개봉한 영화 ‘서브스턴스’의 수입배급사로 많은 분들께 알려져 있을 것 같아요. (웃음)
Q. ‘영화 배급사’라는 게 낯설게 느껴지는 분들도 계실 텐데요. 한 편의 영화가 극장에 걸리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간단히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이 극장에 가면 굉장히 다양한 영화를 만나게 되는데요. 우선 한국 영화와 해외 영화가 있고, 같은 해외 영화 안에서도 상업영화와 독립영화가 나뉘고요. 해외 영화의 경우 디즈니나 워너브라더스처럼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제작하는 영화들은 주로 직접 배급을 해요. 그러면 거기 픽업되지 않은 영화, 보통 독립영화들이 저희 같은 작은 배급사를 통해서 배급이 되는데요. 수많은 영화들 중 구입하고 싶은 작품을 골라서 국내에 들여오고, 언제 어떻게 개봉할지 논의하고, 영화 자막을 넣고, 영화 포스터나 굿즈를 제작해서 마케팅하는 일까지 배급사에서 담당한다고 보시면 돼요.
Q. ‘찬란’은 그동안 정말 다양한 영화들을 수입, 배급해왔잖아요. 평소 영화의 수입·배급을 결정하실 때 어떤 요소를 중요하게 보시는지 궁금해요.
일단은 제가 아트영화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영화들 위주로 작업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회사를 나와 독립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공들여서 제대로 해볼 만한 영화를 작업하면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고요.
저는 이야기 면에서든, 형식이나 스타일 면에서든 이전 영화들과 다른 지점이 있는 영화들을 좋아하는데요. 한국에도 그런 영화를 좋아할 관객들이 분명 있을 거라고 봤고,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포인트를 잘 찾기만 하면 어느 정도의 관객은 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초기에는 규모가 정말 작더라도 한국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가 있는 영화, 그걸 마케팅적으로도 한국 정서에 맞게 만들어볼 수 있겠다 싶은 영화를 골라서 작업했어요.
Q. 한국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고려하신다는 말씀이 흥미롭네요.
이 영화를 한국의 관객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받아들인다면 몇 명 정도가 될까, 그런 고민을 자주 하고, 그걸 기준으로 결정하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또 막상 가져와서 개봉을 할 때가 되면 여러 가지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고, 쉽지 않죠. 지난 작업들을 되돌이켜 생각해 보니 저희가 했던 영화들이 대체로 쉬운 영화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어렵거나 불편하고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작품들이 많았거든요. 저도 쉽고 따뜻하고 예쁜 영화를 좋아하지만 결과적으로 저희 손에 오는 건 항상 좀 어려운 작품들이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이제는 그냥 이게 우리의 운명인가보다 해요.
Q. 찬란은 ‘유전’이나 ‘미드소마’, 그리고 최근의 ‘서브스턴스’까지 장르색이 꽤 강한 영화들도 많이 수입하셨잖아요. 어떻게 보면 마이너하다고 볼 수도 있는 이런 영화들을 선택하신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해요.
처음에는 어느 정도 사업적인 선택이었어요. 2010년대 중반 들어서 아트영화 붐이 시작되면서 수입 경쟁도 굉장히 치열해졌거든요. 그러면서 저희도 무리하게 작품을 구매해야 하는 일들이 생기면서 이런 경쟁에서 벗어나서 안정적으로 수입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해졌어요.
그때 처음 접근했던 게 지금 저희가 많이 하고 있는 호러 장르였어요. 저예산이면서 아이디어로 승부할 수 있고, 신인 감독들이 도전하기에도 조금은 수월한 장르거든요. 호러 장르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흥미로움도 있고요. 그래서 호러 장르를 좀 다뤄볼까 하면서 ‘유전’이라는 작품을 만나게 됐고, 그다음에 ‘미드 소마’ 같은 작품을 거쳐서 ‘서브스턴스’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Q. 익숙하지 않은 장르에 도전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으셨을 것 같아요.
저도 어렸을 때는 호러를 잘 봤는데, 나이를 먹으니까 긴장감을 갖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점점 힘들어지더라고요. 그래서 한동안 안 보고 있다가, 호러 영화를 다뤄봐야겠다 생각하고 나서 혼자 영화관에 갔어요. 주말에 호러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층은 평소 저희 회사가 다루는 영화 관객층과는 많이 다르거든요. 데이트하는 젊은 커플 관객이거나 아니면 그보다도 더 어린 관객들이 많아요. ‘여기서 제일 나이 많은 관객이 나이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영화를 열심히 봤죠. (웃음)
Q. 작년 상반기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악마와의 토크쇼’가 연달아 성공을 거두면서 “찬란의 전성기가 왔다”는 말이 나왔는데요. 그때 어떤 기분이셨나요?
두 영화가 모두 화제가 되면서 정말 많은 관심이 몰렸고, 저희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규모의 관객이 들었어요. 여러 가지 다른 요인과 우연도 있었겠지만 영화 시장의 변화랑 잘 맞아떨어져서 생긴 일 같아요. 영화를 선택하는 저희의 기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거든요.
특히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정말 의외였죠. 주제 면에서나 그걸 풀어가는 면에서나 쉬운 영화가 아닌데 구매가는 또 비싼 편이어서 개봉 전까지 고민을 정말 많이 했거든요. 영화를 구매할 때 바이어들이 본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최대 관객 수는 5만 명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2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들었어요. 그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어려운 영화를 극장에 와서 봐주시는구나, 싶어서 놀라웠어요.
Q. ‘서브스턴스’에 대한 얘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얼마 전 ‘서브스턴스’의 누적 관객 수가 50만 명을 돌파했는데요. 이 영화의 수입을 결정하신 과정이 궁금해요.
저희가 매년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나오는 영화를 평균 한두 편 정도씩 수입을 하는데요. 작년에는 칸 영화제 전까지 구매할 만한 마땅한 영화를 찾지 못한 상황이어서, 괜찮은 영화가 있으면 일단 사야겠다는 목표를 갖고 참석했어요. ‘서브스턴스’는 판권 문제 때문에 마켓에 공개된 시점이 굉장히 늦었지만 데미 무어가 주인공으로 출연한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고, 시놉시스도 너무 흥미로웠기 때문에 중요하게 눈여겨봐야 할 작품으로 미리 점찍어둔 상태였고요.
그래서 공식 상영 전에 열리는 마켓 상영에서 영화를 먼저 봤는데, 정말 재미있는 거예요. 호러 영화라 무서워서 중간에 눈 가리고 나가는 사람도 많았는데, 저는 끝까지 보고 나온 다음에 ‘정말 너무 재밌다’고 생각했어요. 저랑 같이 들어간 직원들도 다 재미있게 봤다고 했고요. 저희 직원들끼리 이렇게 다 의견이 일치하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이라, 어떻게든 이 영화는 꼭 사 가자고 결심했어요.
Q. 서브스턴스의 당시 구매 가격이 상당히 높았다고 들었어요.
저희가 지금까지 구매했던 영화 중에서 가장 비쌌어요. (웃음) 그래서 한국 돌아와서도 계속 고민하다가 결국 구매를 결정했죠. 사실 호러 장르는 아카데미나 연말 시상식 같은 곳에서 수상을 하기에 유리한 장르는 아니에요. 그래서 아카데미 수상작들이 쏟아지는 1~2월이 아닌 12월 초로 당겨서 개봉하기로 결정했는데, 데미 무어가 배우로서 던진 승부수가 잘 통하면서 개봉 초부터 좋은 스코어를 기록했어요. 그러다 골든글로브 수상을 계기로 상황이 훨씬 더 좋아졌고요. 제가 재미있다고 생각한 영화가 시장 상황과 맞물려서 좋은 결과로 이어지니까 너무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에요.
“영화를 영화 자체로 경험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요.”: 현실에 실망하지 않고 계속 좋아하는 일을 하는 방법
Q. 대표님은 영화 월간지 기자와 영화 수입배급 마케터를 거쳐서 지금의 자리에 이르셨다고 들었어요. ‘찬란’의 대표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영화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라 기자 일도 하고, 마케터로도 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웃음) 마케터로 일했던 회사에서는 유럽 아트영화나 일본 영화 수입 일을 주로 했어요. 그 당시, 그러니까 2000년대 중반 즈음에는 일본 영화들이 젊은 관객들에게 트렌디하게 받아들여졌거든요. ‘인디영화관(현 CGV 아트하우스)’을 중심으로 다양성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들이 막 생겨나기 시작할 때기도 했고요.
그때 제가 담당했던 영화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었는데, SNS가 없던 시절이었는데도 여러 온라인 게시판 같은 곳에 영화 후기나 감상이 올라오는 걸 보면서 굉장한 재미를 느꼈어요. 관객들과 나의 마음이 한 곳에서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그 이후로도 수많은 영화들을 개봉시키면서 이 일에 재미를 붙이게 된 것 같아요.
Q. 배급사 대표가 영화를 바라보는 관점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요. 제작자나 감독의 관점과도, 마케팅만 담당하는 사람의 관점과도 다른 점이 있을 것 같은데, 스스로 어떻게 느끼시나요?
기본적으로는 영화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의 관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같아요. 저랑 일하는 직원분들도 마찬가지고요. 영화를 봤을 때 ‘이건 좋아요’, ‘이건 싫어요’ 하는 각자의 감상이 일단 일차적인 기준이 되긴 해요. 좋다 싶은 것들 중에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처럼 엄청난 완성도와 감동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영화도 있고, 형식은 파격적이지만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보편적인 영화도 있고요. 그런 것들이 모두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좋다’는 감정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 감각이 우선이 되는 것 같아요.
그다음에 이게 한국 시장에 먹힐까 안 먹힐까 하는 고민을 시작하는 거죠. 가격도 중요한 고려 요소고요. 이 일도 결국은 사업이고, 수익을 내야 하는 일이니까요. 그렇지만 가끔 미련을 버리지 못할 때도 있어요. ‘이 영화 사면 안 돼요, 대표님’ 하고 직원들이 말릴 때도 종종 있고요. (웃음)
Q. 대표님의 지난 인터뷰를 보면서 ‘다양성’과 ‘소수자성’이 대표님에게 있어 중요한 키워드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요. 이런 영화들을 꾸준히 소개하시는 동력이 뭔지 궁금해요.
문화예술 종사자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열려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계속해서 새로운 걸 받아들여야 하고, 그걸 통해서 자신이 갖고 있는 재능이나 비전을 대중에게 보여줘야 하니까요. 새로운 걸 받아들일 때마다 주저한다면 내가 향유할 수 있는 기회도 제한될 수밖에 없고요. 저 역시 엄청난 사명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기보단, 그냥 이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태도나 기준, 가치를 지키는 것에 가까워요.
계속 소수자성과 관련된 콘텐츠들을 접하다 보니 사고의 폭이 넓어지는 것도 있어요. 이건 어떤 사회적 가치에 대한 얘기일 수도 있고, 형식적인 것에 대한 얘기일 수도 있는데요. 저희가 했던 영화 중에 ‘지구 최후의 밤’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형식적으로 굉장히 새롭거든요. 서사를 전개하는 방식도 비선형적이고, 이어지는 듯 안 이어지는 듯 전형적이지 않은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지만 영화를 끝까지 다 봤을 때 느껴지는 감동이 있어요. 그렇게 영화를 영화 그 자체로 경험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지점이 있는데, 그런 즐거움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서 계속 이런 작업을 하는 것 같아요.
Q. 내가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오잖아요. 영화 수입·배급은 큰돈이 오가는 일인 만큼 그 허들이 낮지 않을 텐데, 그럴 땐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시나요?
사실 처음에 찬란을 시작했을 땐 너무 즐거웠어요. 회사에 소속돼 있던 때는 제가 움직일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었고, 온전히 제가 판단한 대로 결정할 수 없는 게 많았으니까요. 그런데 찬란을 시작하니까 이제 제가 원하는 걸 제 책임으로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게 굉장히 즐거웠어요. 정말 ‘이렇게 즐거울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요. (웃음)
그런데 2~3년 정도가 지나니까, 이게 그저 즐기기 위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점점 느끼게 됐어요. 저와 제 직원들의 생계가 회사에 걸려 있으니까요. 또 사업이라는 건 같은 수준을 계속 유지한다 해도 그게 퇴보가 되더라고요. 항상 뭔가 도전을 해야 하고, 성장을 해야 하고요. 그래서 너무 위험 부담이 큰 영화를 선택하는 게 점점 쉽지 않아지는 것 같아요.
Q.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 일을 이어갈 수 있는 동력은 뭔가요?
저는 여전히 영화 보는 일이 너무 즐거워요. 이제 와서 다른 일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도 들고요. (웃음) 외부적인 변화 때문에 사업 환경이 어려워지고 그런 것만 아니면 정말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만큼 즐거운 일은 없는 것 같거든요.
영화를 아예 벗어나기는 어렵지만, 영화라는 우물 안에서는 여러 도전을 해 보려고 해요. 호러 장르에도 도전해 봤고, 저희가 1년에 한두 편 정도는 키즈 애니메이션도 꾸준히 개봉하고 있거든요. 다양한 시도를 해야 제가 좋아하는 영화 일을 더 길게 할 수 있으니까, 그런 변화를 계속 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극장에서 봐야 하는 이유가 있는 영화라면, 관객들은 언제나 극장을 찾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기획자 이지혜가 바라보는 영화 시장의 미래
Q. 요즘 영화 시장이 어렵다는 말이 많이 나오잖아요. 아트영화 시장의 상황은 어떤가요?
아까 잠깐 말씀드린 것처럼 2010년대 중반에는 아트영화를 많이 보는 분위기가 있었고, 그게 코로나19 전까지 이어졌거든요. 그런데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시장이 많이 바뀌었고, 엔데믹 이후에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아 더 어려운 상황이 됐어요. 예전에는 ‘그래, 올해 힘들었어도 마켓 가면 또 좋은 영화 나올 테니까 괜찮겠지’ 했지만, 요즘은 아니에요. 시장에 나오는 영화의 편수 자체가 전 세계적으로 많이 줄었어요.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OTT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시장에도 큰 변동이 있다 보니까, 그런 변화가 이젠 그냥 당연한 게 된 것 같아요. 그런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항상 좀 있죠.
Q. 한편으로는 관객 수가 몇십만 명이나 되는 아트영화들이 연달아 나오면서, ‘아트영화의 황금기가 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원래는 아트영화에 관객이 1만 명만 들어도 성공이라고 얘기를 했거든요. 그런데 2014년도에 개봉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엄청나게 잘 되면서 일종의 아트영화 붐이 시작됐어요. 그 해에 ‘Her’라는 호아킨 피닉스가 출연한 영화가 개봉해 성공을 했고, 저희가 했던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도 14만 명 정도의 관객이 들었거든요. 사이즈는 조금 다르지만 ‘비긴 어게인’ 같은 작품도 나왔고요.
이런 흐름은 점점 커지고 있는 것 같아요. 2023년 말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에 50만 관객이 들었고, 그다음 해 개봉한 ‘추락의 해부’도 10만 명이나 봤잖아요. 하반기에 개봉한 ‘퍼펙트 데이즈’도 규모가 큰 작품이 아니었는데도 많은 사랑을 받았고요. 그런 현상을 보면서 소규모 아트영화지만 퀄리티가 검증된 영화라면 관객들은 언제든 극장을 찾는구나, 느끼게 됐어요.
Q. 아트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늘고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요즘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영상을 볼 수 있는 시대잖아요. 다들 유튜브 없이는 못 살고, OTT 서비스도 최소 한두 개씩은 구독하고 있고요. 그래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쉽고 무난한 영화보다는, 오히려 극장에 가서 봐야만 하는 작품이 관심을 받게 되는 것 같아요. 2시간이라는 시간 안에 깊은 만족을 줄 수 있는 영화, 혹은 극장이라는 환경에서 봤을 때 훨씬 더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면 관객들은 언제든 다시 극장을 찾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죠.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서브스턴스’, ‘더 폴: 디렉터스 컷’ 같은 영화들의 잇단 성공이 그걸 증명한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아트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아트영화 시장도 점점 양극화되고 있는 것 같아요. 배급사들 사이 경쟁도 치열해졌고요. 원래 아트영화를 다루지 않던 회사들도 시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거든요. 그 결과 잘 되는 아트영화는 예전보다 훨씬 잘 되지만, 안 되는 영화는 진짜 너무 안 돼요. 그 중간이 사라져서 아쉽다는 생각은 종종 들어요.
Q. 마지막으로, 자신만의 기획을 시작하고 싶지만 망설이고 있는 여성들에게 한 마디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시대가 변하고 세대가 변하고 있다 보니, 젊은 친구들에게 뭐라 쉽게 말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저도 예전에 직원들을 뽑을 땐 ‘결국 네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야?’ 물어봤거든요. 영화 프로듀서가 꿈이라고 하면 언젠가는 그 친구가 영화 제작사에 들어가야 하고, 배급사 대표가 꿈이면 직접 마켓에 나가서 영화를 구매하고, 개봉까지 담당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정도의 꿈을 갖고 일을 해 나가길 바랐던 거죠.
그런데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저는 하고 싶은 일을 무모하게 시도해도 미래의 가능성이 열려 있었던 시대에 20~30대를 보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뭐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끝까지 도전해 보라고 하고 싶지만, 요즘은 그렇게 말하기 쉽지 않은 때인 것 같아요.
그래도 사실은 언제가 됐든 여전히 지금이 가장 젊은 때라고, 뭐든 할 수 있을 때라고 생각해요. 저도 이 일을 그렇게 빨리 시작한 편은 아니었거든요. 학교 졸업한 뒤에 3~4년이 지나서 영화 일을 처음 시작했고, 영화 잡지 기자가 된 것도 20대 후반이었어요. 마케팅을 시작한 건 그보다도 더 이후였고요. 그러니까 결론은, 언제든 과감하게 도전해 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지금이 가장 젊은 때다. 아직 늦지 않았다. 늦었다는 건 사실 없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