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했던 아베크롬비의 근황: 지금 가장 핫한 브랜드라고? 👕🩳
작성자 고슴이의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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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했던 아베크롬비의 근황: 지금 가장 핫한 브랜드라고? 👕🩳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커다란 성공, 하지만 성공과 함께했던 공공연한 인종 차별과 배제주의가 유발한 많은 논란을 뒤로 한 ‘아베크롬비 앤 피치(Abercrombie & Fitch)’는 어두운 그림자로 잔뜩 뒤덮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이 브랜드가 부활하고 있다는 소식이 계속 들려오고 있습니다. 망해가던 패션 브랜드의 부활은 많은 시사점을 보여주기 마련입니다. 오늘은 아베크롬비 앤 피치(이하 아베크롬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베크롬비 탄생과 성공, 몰락의 간단한 역사 👖
아베크롬비의 부활이 그저 이미지가 괜찮아진 정도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최근 6분기 연속 두 자릿수 매출 성장을 기록하고 있고 작년 말 미국의 홀리데이 쇼핑 시즌의 최고 승자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하 브랜드인 ‘홀리스터(Hollister Co.)’도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즘 같은 시절에 이례적인 성적을 내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아베크롬비는 꽤 재미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만들어진 건 1892년 미국 뉴욕이었고 고급 아웃도어 브랜드였습니다. 레저와 모험 활동을 즐기는 엘리트들을 위한 의류와 함께 비싼 산탄총, 낚싯배, 텐트 등을 판매했죠. 아이비리그 대학교를 나와 뉴욕에 거주하는 고소득 상류 계층이 주 고객이었고 여기에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나 어니스트 헤밍웨이 같은 문인도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아이비, 프레피 패션의 일부였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1970년대 들어 해외 라이센싱을 기반으로 한 저가의 경쟁사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시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했고, 판매용 사치품 재고를 잔뜩 보유하고 있던 덕분에 너무 높았던 유지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1976년 결국 파산을 신청하게 됩니다. 이후 아베크롬비는 주인이 몇 번 바뀌게 되고 그와 함께 브랜드의 성격도 변화하게 됩니다. 그리고 1988년 The Limited(나중에 L Brands로 이름을 바꿈)에 인수되면서 본격적으로 젊은 세대에게 초점을 맞추는 브랜드가 됩니다.
참고로 L 브랜즈는 아베크롬비와 함께 란제리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Victoria's Secret)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 세 브랜드가 모두 여성혐오와 인종차별, 고착화된 사내 괴롭힘 문화 등으로 법적 소송에 휘말렸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문제의 시작은 여기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1990년대 들어 마이크 제프리스(Mike Jeffries)가 아베크롬비의 CEO가 되었고 이때부터 우리가 익히 아는 아베크롬비가 나옵니다. 그는 성적인 이미지를 중심으로 브랜드를 재편했습니다. 윗옷을 벗은 근육질의 남성 모델들을 매장에 늘어서게 했고, 성적인 암시가 가득 찬 광고와 대형 간판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이런 리브랜딩은 열광적인 팬덤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런 성공 속에서 2000년에는 낙관적이고 느긋한 ‘캘리포니아 라이프스타일’에 초점을 맞춘 서브 브랜드 홀리스터도 런칭합니다.
아베크롬비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젊은이들의 패션을 지배했다고 할 만큼 큰 인기를 끌었지만, 차츰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CEO인 제프리스의 발언과 그에 기반한 마케팅 방식이 점점 더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멋지고 잘생긴 사람들을 대상으로만 마케팅을 하고 싶다고 말했고, 과체중,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 노인들이 자기네 옷을 입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 패션은 누구에게도 흥분을 주지 못하고 그저 평범해진다고 말했죠. 이런 배제적인 방식과 인종차별적 태도는 브랜드의 이미지에만 있는 게 아니라 고용 정책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CEO의 여러 기행과 함께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후일 많은 소송에 휘말립니다.
점차 매출과 주가는 폭락했고 주요 매장은 문을 닫게 됩니다. 그리고 패션 브랜드로서 더 치명적인 인종차별과 나이, 몸집 등에 기반한 차별과 배제적인 태도라는 나쁜 이미지가 아베크롬비라는 브랜드에 따라붙게 됩니다. 제프리스는 결국 2014년 CEO 자리에서 물러났고 같은 해 홀리스터의 사장으로 임명되었던 프랜 호로비츠가 2017년 새로운 CEO를 맡게 되면서 브랜드를 다시 재편하기 시작합니다. 지나친 성 상품화와 인종차별로 특히 밀레니얼 세대 소비자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2016년에는 미국에서 가장 미움받는 리테일러로 선정되기도 했던 아베크롬비 입장에서는 재기를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무척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아베크롬비의 리브랜딩을 맡게 된 프랜 호로비츠는 아베크롬비의 이미지를 훼손시켜 오던 일련의 스캔들과 거리를 두고, 공급망부터 타겟 고객까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꿔나갔습니다. 예전 로고에서 상징적인 무스 그림을 빼고 글자만 남겨 더 심플하게 만들고 고급스러움을 유지하되 예전보다 훨씬 경쟁력이 강해진 패스트패션 브랜드에 대항해 가격을 낮춥니다. 고객에 관심이 별로 없어보인다는 평을 듣던 매장 직원의 태도도 수정합니다.
특히 브랜드의 타겟층을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 이들부터 풀타임으로 일하는 40대까지에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대 광고에 나오던, 내일이 없다는 듯 오늘을 질주하는 젊음이 아니라 이제 나이가 들어가며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게 된 직장인을 겨냥하기 시작한 거죠. 이들이 사무실에서 입을 수 있는 블레이저, 결혼식장과 파티장에 갈 때 입을 드레스, 운동복 라인과 잠옷 등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커버하는 옷을 선보입니다. 광고도 크게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남녀 모델들 대부분이 상하의를 제대로 갖춰 입고 있습니다. 거의 젊은 백인이었던 광고에는 흑인, 아시안, 몸집이 큰 사람, 나이 든 사람 등등 다양성을 포함하고 지속 가능성을 내세웁니다.
예를 들어 몇 년 전에 선보인 슬론 팬츠 같은 제품에서 새로운 아베크롬비의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모든 여성이 직장에 갈 때나 휴식을 취할 때, 친구를 만날 때 등 종일 입는 데 적합한 바지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습니다. 상당히 높은 라이즈의 테일러드 와이드 레그 팬츠로 23인치부터 37인치까지의 사이즈, 5cm 간격의 3가지 바지 길이, 7가지 색상 등 다양한 선택지가 마련됐습니다. 여기에 계절별 다른 소재, 컬러와 숏팬츠 버전까지 있죠.

우리 아베크롬비가 달라졌어요 👀👀
아베크롬비의 변화 과정을 되짚어 봅시다. 처음 아이비 패션의 시기, 성적 암시와 배제주의의 시기 그리고 지금 찾아온 무채색과 실용주의, 절제의 시기는 서로 매우 달라보입니다. 하지만 각각의 시기마다 브랜드는 모두 나름의 인기를 얻었고 성과를 냈습니다. 아베크롬비는 럭셔리 패션 하우스처럼 맨 앞에서 패션을 선도하고 이끌며 패션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브랜드는 아닙니다. 하지만 흐름을 파악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걸 제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초기의 가장 유력한 소비자는 아이비리그 대학교를 나와 뉴욕에서 일자리를 잡아 거주하게 된 상류 계층 혹은 상류 계층 지망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딱 맞는 고급 레저 의류를 제공했죠. 1990년대 말도 비슷합니다. 괴팍한 CEO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고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 ‘화이트 핫’도 있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런 시대였습니다.
백인, 근육질과 글래머러스한 몸, 성적 어필을 앞에 두고 “이상한 소리 좀 하면 어때, 옷은 멋지잖아”의 마음가짐으로 브랜드의 차별적 언행과 기괴한 만행을 애써 모른 척하고 심지어 그런 태도를 남과 다른 유니크함이라 여기는 시절이었던 겁니다. 몸집이 크면 게으르다고 비난하고, 키가 작으면 발목을 상해가며 높은 굽을 신고, 남이 입은 옷뿐만 아니라 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나 때문에 당신이 뚱뚱해 보이나요?”나 “갈색 머리가 되는 악몽을 꿨어” 같은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자신을 몸소 저열한 농담의 일부로 만드는 쿨함을 멋지다고 여기는 시대였던 거죠.
지금의 변화도 마찬가지로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를 끼고 성장한 밀레니얼 이후 세대들은 차별과 배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목소리를 높여왔습니다. 인종차별이나 성적 대상화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 불매 운동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제프리스를 무너트린 것도 이런 움직임의 결과였죠.
새로운 아베크롬비는 편안하고 실용적인 옷, 모두를 커버하는 넓은 사이즈 범위와 여러 인종이 등장하는 광고로 이런 흐름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게 별로라는 이야기를 하는 건 전혀 아닙니다. 이런 변화를 무시하고 시대를 역행하거나, 배제를 남과 다른 패셔너블함으로 인지하는 브랜드도 여전히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베크롬비는 적어도 세상 돌아가는 걸 보고 있고 그런 흐름에 부응할 수 있는 CEO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패션은 궁극의 미를 쫓는 문화가 아닙니다. 기준은 끊임없이 변하고 바로 얼마 전 멋지다고 오픈 런을 해가며 입던 옷은 어느덧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심지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돌아보면 시대의 거울이 되는 건 분명합니다. 미국은 다시 트럼프의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저번 트럼프의 시대에 패션은 사회적, 정치적 슬로건을 앞세우며 성차별, 인종주의, 이민자 억압에 대항했습니다. 차별적, 성적 농담이 그저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라 생각하던 이들은 과연 생각이 달라졌을까요? 이번에는 과연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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