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가 패션을 만났을 때: ‘러닝코어’ 유행에서 알 수 있는 것들 🏃
작성자 고슴이의비트
비욘드 트렌드
스포츠가 패션을 만났을 때: ‘러닝코어’ 유행에서 알 수 있는 것들 🏃
올해 가장 얘기가 많이 나왔던 패션 트렌드 중 하나는 러닝코어입니다. 러닝은 달리기죠. 그리고 ‘코어’는 최근 가장 많이 보이는 패션 용어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달리기는 좋은 일입니다. 패션 유행 때문이라고 해도 그 덕분에 더 멀리 퍼져 나가고, 한 사람이라도 더 달리기를 하러 나서게 된다면 긍정적인 영향이라 할 수도 있겠죠. 오늘은 러닝코어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니다.
코어 패션이란 무엇인가
일단 코어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짚고 넘어가 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이름 뒤에 ‘-코어’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 유행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코어 패션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여기서는 중요한 특징 몇 가지를 짚고 넘어가면 될 듯합니다. 우선 코어 패션은 패션이 아닌 것, 혹은 패션이 아니라 여겨졌던 걸 가져다 패션으로 취급 혹은 받아들여지게 된 걸 말합니다. 이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계기로 ‘놈코어’가 있는데 여기서 ‘놈(norm)’은 ‘노멀(normal)’을 말합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무늬도, 로고도 없는 평범한 옷을 입는데 그걸 패션으로 여깁니다.
이런 식으로 패션으로 취급되지 않던 게 멋지다는 대접을 받게 되는 겁니다. 이제 무엇이든 가져다 붙일 수 있고 고프코어, 캠프코어, 발레코어, 카우보이코어, 바비코어, 고스코어, 아카데미아코어 등등 계속 늘어납니다. 참고로 여기서 고프(gorp)는 하이킹, 트레킹을 뜻하고 바비는 바비 인형, 고스는 고딕 록(Gothic rock) 밴드나 드라마 ‘웬즈데이’나 ‘아담스 패밀리’에 나오는 사람처럼 입는 걸 말합니다. 아카데미아는 예전 대학생처럼 입는데 ‘프레피 패션’과 흡사합니다. 이렇게 아주 다양하고 끝도 없이 계속 등장할 수 있습니다.
주목할 부분은 ‘-코어’ 트렌드는 디자이너가 제시하고 사람들이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즐겨하고, 그걸 SNS나 틱톡 같은 데 올리고, 그걸 보고 멋지다고 생각해서 따라 하는 식으로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패션 디자이너들이 이걸 받아 재소화하는 식으로 나아갑니다. 말하자면 위에서 아래로의 패션 트렌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트렌드입니다. 게다가 패션은 사실 주인공이 아닙니다. 특정 영역에 진입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패션이 따라오는 식입니다.
물론 이런 방향이 유난히 독특한 건 아닙니다. 펑크, 고딕, 모드 등등 예전의 수많은 하위 패션 문화가 이런 식으로 생겨났습니다. 다른 점이라면 이전의 하위 패션이 지역과 계층을 기반으로 형성되고 패션 디자이너들에 의해 세상으로 퍼진 반면, 지금은 인터넷과 Z세대가 아주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덕분에 하나의 트렌드가 더 빠르고 광범위하게 퍼집니다.
코어 패션을 보면 스포츠 계열에서 온 것들이 많이 보이고, 이 외에 인기 있는 영화나 드라마, 유행하는 밈(meme) 같은 데서 온 것들이 꽤 있습니다. 고딕 룩, 페티시 룩, 코스프레 등 기존에는 사회의 구석진 곳, 인터넷의 밑바닥 어딘가에서 암약하던 어둠의 서브컬쳐에서 온 것들도 꽤 있죠. 패션 바깥에서 옷과 상관없이 유행하던 활동들이 패션과 한배를 타게 되는 식입니다.
이중 러닝코어는 스포츠 계열에서 온 겁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코어 패션의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디자이너가 스포츠에서 영감을 얻어 ‘패션화’했고, 그러다 보니 이미지만 남기고 기능적인 면과 연출 방식은 도시 생활에 맞도록 수정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스포츠 계열의 코어 패션은 원래 영역에서 사용되던 옷과 신발 같은 아이템을 그대로 가져다 씁니다.
왜냐하면 ‘뭘 하는 사람이든 그냥 멋진 모습을 연출하는 옷’이라는 패션의 기존 한계를 넘어 ‘저런 활동을 하니까 멋진’ 사람으로 개념을 확장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실제 산을 오르고, 거리를 달리는 데 사용하는 옷과 신발이 자연스럽게 동원됩니다. 즉 예전에는 스포츠와 패션의 영역이 분리되어 있었다면 지금은 이런 스포츠를 즐기는 것 자체가 멋지다고 받아들여지는 식입니다. 패션이 옷을 넘어 라이프스타일이 되고 있다는 건 이런 의미일 겁니다.
물론 놈코어 이후 코어 트렌드는 글로벌 유행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 거대한 시장이 자기들끼리 멋대로 굴러가게 패션 업계가 내버려둘 리가 없죠. 고급 패션 브랜드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코어 유행을 주도해 나가기도 합니다. 예컨대 고프코어 패션은 원래 하도 오랫동안 입어서 넝마처럼 된 낡은 등산복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니자던 시큰둥한 태도였지만, 이제는 고급 브랜드가 재현해 낸 낡음과 비일상의 느낌, 등산복의 촌스러움을 로고와 함께 비싼 가격에 판매하는 장으로 변해갔습니다.
러닝과 패션의 트렌드
이러한 코어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다시 러닝으로 돌아가 봅니다. 러닝은 오래된 취미입니다. 패션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오랫동안 뛰어왔습니다. 혼자 뛰기도 하고, 동호회에 들어가 뛰기도 하고, 산에서 뛰고, 도로에서 뛰었습니다. 하지만 SNS와 스마트폰 등의 등장으로 약간 추세가 바뀌었습니다. 뛴 거리와 속도, 지쳤지만 뿌듯한 나의 모습을 손쉽게 SNS에 올릴 수 있습니다. 게다가 스마트폰과 스마트워치로 페이스, 심박수, 소모 칼로리 등 전자시계 스톱워치를 차고 운동장을 뛰던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많은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마추어도 데이터를 추적하며 기록을 관리해 나갈 수 있죠.
이런 것들이 결합하며 러닝 인구는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코로나19가 끝나갈 무렵 크게 늘어난 건강 관리에 대한 관심 속에서 답답함을 이기고자 레깅스에 메쉬 러닝 베스트를 입고 산을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맞춰 기존 아웃도어 브랜드들도 트레일을 뛰는 사람들을 위해 다양한 제품군을 출시했습니다.
팬데믹 이후에도 러닝 열풍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러닝 기록을 인스타그램에 올릴 뿐만 아니라 몇 개월 동안 매일 아침 달리는 모습을 브이로그로 찍어 유튜브에 올리는 이들도 많아졌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자극이 되고 동참하는 이들도 늘어나죠. 방송도 있습니다. ‘나혼자산다’에서 기안84가 뉴욕 마라톤을 뛰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자극을 줬습니다. 또한 여배우 4인이 달리기가 포함된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한 ‘무쇠소녀단’도 있었죠. 각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극복하면서 결국 완주해 내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줬습니다.
나이키가 주춤하고 있는 사이 러닝화 시장도 아디다스, 뉴발란스, 써코니, 미즈노, 아식스 등 여러 브랜드가 경쟁하며 판이 넓어졌고, 온러닝이나 호카, 노다, 살로몬 등 달리기 기능에 집중하고 있는 신흥강자 브랜드도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달리기를 시작했으니 이왕이면 좋고 인기 있는 러닝화와 패셔너블한 옷을 입고 뛰고 싶다는 흐름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러닝 트렌드는 정점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서울마라톤, JTBC 마라톤 등 일반 참가자가 풀코스를 뛸 수 있는 마라톤 대회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참가 신청조차 쉽지 않습니다. 참가자 10명 중 6~7명이 20대, 30대라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아디다스에서 서울마라톤 추가 신청을 두고 제품 구입과 연계한 패키지를 출시했는데 전국에서 오픈런이 벌어졌습니다. PAF와 온러닝이 협업으로 출시한 러닝화는 프리미엄 가격이 붙어 거래되고 있습니다. 각 브랜드의 인기 제품은 다 비슷한 상황입니다.
유행이 깊어지면 등장하는 문제들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러닝화 계급도가 만들어져 위화감을 조성하고 저렴한 러닝화를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생겨나죠. 러닝 크루들이 몰려다니며 요란하게 소란을 피워 뉴스에도 나오고, 러닝크루의 출입을 금지한 공공 운동장들도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건 유행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현대인이 지녀야 할 기초 상식의 문제이긴 합니다. 자신의 가치 기준을 쌓아 올리지 못했으니 떠돌아다니는 모호한 권위에 기대어 다른 가치관을 배척하고, 무리 속에 파묻히면 없던 객기가 생겨나는 사람들이죠. 어디에서 뭘 해도 비슷하게 행동할 겁니다.
이제 러닝 인구는 늘어났고 러닝코어 패션이 인기를 누리지만 여전히 많은 방식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일상 운동화를 신고 혼자 묵묵히 동네를 달리는 사람도 있고, 카본이 들어있는 최신의 플래그십 러닝화에 리셀 사이트에서 구매할 수 있는 바람막이와 모자를 쓰고 풀코스 마라톤을 달리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게 입고 달리기 근처에 가지도 않는 사람들도 있겠죠. 인생에서 어떤 걸 즐길지는 자기 마음이니까요. 이런 식으로 러닝과 패션은 각자의 영역과 함께 서로 얽혀있는 교집합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운동이 만들어 내는 패션의 미래
패션은 한때 옷을 꾸미는 방식이나 디자이너가 만들어 낸 유니크한 세계를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이 경계는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운동과 관련된 분야의 유입은 점점 더 커지고 있죠. 캠핑, 서핑, 골프와 테니스, 사이클, 트레킹, 하이킹, 러닝까지 이어져 오는 동안 사람들은 실용적이고 기능적이면서도 일상 바깥이라는 분위기를 내뿜는 스포츠 의류 특유의 패션 미감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즐겁게 하면서 그걸 자신의 패션으로 확장해 가려는 생각을 가진 이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빠르고 쉼 없이 변하는 트렌드 속에서 러닝코어도 곧 다른 유행에 자리를 내주게 될 겁니다. 누군가는 달리기를 이어가겠지만 또 누군가는 그 기억을 새카맣게 잊어버리겠죠. 그래도 유행이 지나가고 난 뒤 안 입게 된 옷이 쌓이는 것보다 달리기가 만들어 낸 늘어난 심폐량과 근육이 쌓이는 것도 나름 보람이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건강을 중시하고 운동을 즐기며 그런 활동의 확장에서 나오는 패션을 즐기는 경험도 쌓이겠죠. 이런 태도들이 그저 옷으로만 뽐내고 즐거운 게 아닌 삶의 방식과 결합되어 있는 새로운 방식의 패션을 만들어 내는 밑바탕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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