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성국극’ 드라마, ‘정년이’의 흥행이 보여주는 것

최초의 ‘여성국극’ 드라마, ‘정년이’의 흥행이 보여주는 것

작성자 고슴이의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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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성국극’ 드라마, ‘정년이’의 흥행이 보여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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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네일 이미지 출처: (왼쪽)ⓒ나몬, (오른쪽)ⓒtvN

tvN 드라마 ‘정년이’가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서이레 작가가 스토리를, 나몬 작가가 작화를 담당한 동명의 웹툰을 드라마화한 ‘정년이’의 첫화 시청률은 4.8%로 시작했으나 6화는 13.4%를 기록하며 고공행진중입니다. 이 드라마는 1950년대 중반, 서울로 상경해 국극배우로서의 삶에 도전하는 소리 천재 ‘정년이’와 여성들의 연대, 성장기를 담았는데요. 오늘은 드라마 ‘정년이’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여성국극의 흥망성쇠와 편성 변경 관련 잡음을 살펴봅니다.


여성국극, 그 화력의 시작

1948년, 여성 국악인들이 모여 선보인 ‘옥중화(獄中花)’를 계기로 시작된 여성국극은 한국전쟁 직후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배우들을 1세대 여성국극인이라 부르는데요. 드라마 ‘정년이’ 오프닝에서 배우들을 힘 있게 소개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1세대 여성국극인 ‘조영숙’ 명인입니다. 올 해 90세의 조영숙 명인은 올 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Sync Next 24: 조 도깨비 영숙’ 무대에 오른 현역 예술인이기도 해요. 

여성국극은 소리, 춤, 연기가 어우러지는 종합 예술인데요. 배우가 연기로만 승부를 거는 연극과 다르고, 1인이 모든 배역을 도맡는 판소리와도 차이가 있어 다른 공연예술과 장르적으로 구분됩니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라면, 남자 역과 여자 역을 모두 여성 배우가 맡아 연기한다는 점입니다. 

그 시절, 여성국극의 인기는 무대 위에서 남자 역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왕자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이들의 인기가 정말 대단했다고 해요. 드라마에서는 정은채 배우가 매란국극단 소속 단원들은 물론이고 관객들을 마음까지 사로잡는 남역 배우 전문 캐릭터 ‘문옥경’으로 등장하는데요. 조금앵 명인이 여성팬과 가상의 결혼사진을 촬영한 건 여성국극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 중 하나입니다. 오늘날 덕후들의 필수코스로 자리잡은 최애와 함께 찍는 네컷사진 전에 여성국극의 세계에서는 좀 더 과감한 팬 서비스가 있었던 거죠.

그러나, 1960년대에 접어들며 여성국극은 점차 쇠퇴하게 됩니다. 가장 큰 원인으로는 영화, TV 등의 매체가 도입되며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드라마에서도 TV와 함께 하는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종로방송국 PD ‘박종국’(김태훈)의 제안으로 정년이가 극단을 잠시 떠나 방송의 맛을 보는 장면이 있죠. 자연스레 1960년대의 대중들은 새로운 취향을 가지게 되고, 이 과정에서 여러 극단들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으며 문을 닫게 됩니다. 

다행히도 20세기 후반까지 명맥이 끊겨있던 여성국극을 이어가려는 움직임이 조금씩 보이고 있습니다. 2020년, 조영숙 명인의 제자들인 박수빈, 황지영 배우는 ‘여성국극제작소’를 설립하고, 여성국극을 배우고 싶은 신규 단원들을 찾는 공개 오디션을 개최했습니다. 이들은 2024년 10월, 조선 후기 화가 김홍도의 생애를 다룬 창작 국극 공연 ‘화인뎐’을 무대에 올렸고요. 


정년이는 왜 tvN에서 방영되어야만 했을까

드라마 ‘정년이’는 여성국극의 매력을 온전히 보여주기 위해 극중극에 힘을 쓰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드라마가 끝나면, 이날치 보컬리스트이기도 한 권송희 소리감독, 이이슬 안무감독 등등 극중극을 위한 엔딩크레딧이 길게 이어지는 걸 볼 수 있는데요. 그만큼 제작진이 국극 무대 연출과 고증에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죠. 또한, 티빙은 '춘향전', '자명고' 등을 끊김 없이 볼 수 있는 ‘‘정년이’ 속 국극 풀버전’ 콘텐츠를 별도 공개하며, 시청자들이 공연예술 자체로서의 여성국극을 감상해보길 제안하고 있습니다. 

극중극 장면을 보면 무대 위 배우들의 대사와 몸짓 하나하나에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반응 하는 모습이 눈에 띄는데요. 이는 최근 논란이 일었던 관객 에티켓인 ‘시체 관극’과는 무척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실제로 제작진은 촬영 전 ‘관객 리액션 교육’을 실행했다고 해요. “1950년대를 살아가는 관객들은 눈 앞에서 펼쳐지는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게 자연스러웠을 것”이라는 의도가 담긴 연출이죠.

한편 드라마 ‘정년이’는 편성 변경으로 인한 잡음이 있었습니다. MBC에서 방영되기로 했던 드라마가 최종적으로는 tvN에서 공개된 것인데요. 웹툰 ‘정년이’의 초기제작사는 총 세 곳(스튜디오N, 매니지먼트mmm, 앤피오엔터테인먼트)이었습니다. 이들은 ‘옷소매 붉은 끝동’을 연출한 정지인 감독을 섭외하면서 MBC에 편성과 드라마 제작비 투자를 제안했지만 협상이 잘 되지 않아 결국 CJ ENM 산하 제작사 ‘스튜디오드래곤’과 손을 잡게 됩니다. 

드라마 방영을 앞둔 지난 9월경, MBC는 ‘업무상 성과물 도용으로 인한 부정경쟁방지법위반 및 계약교섭의 부당파기로 인한 손해배상청구’를 근거로 제작사 재산에 가압류를 신청하기에 이릅니다. 최종 편성 불발로 MBC 드라마 라인업 구축에 차질이 생겼고, ‘정년이’를 기획 개발한 정지인 PD의 퇴사는 인력 유출을 의미한다는 입장이었죠. 그러나, 제작사들은 MBC가 일전에 “제작비 절감 명목으로 주요 스태프를 교체하라는 요구”를 했다는 점, “편성 협상이 결렬되면서 촬영이 한 달 지연” 되었다는 점을 들어 이에 반박했습니다. 

드라마 편성이 변경되는 건 더 이상 드문 사례가 아닙니다. 2023 SBS 연기대상에서 티저 영상으로 공개된 드라마 ’강매강’은 디즈니+로 편성을 옮겨 지난 9월 공개됐고,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약한영웅: Class 1’은 넷플릭스에서 두 번째 시즌을 공개했습니다. 2025년 상반기 방영 예정인 남궁민, 전여빈 주연의 드라마 ‘우리 영화’는 tvN에서 SBS로 편성이 변경됐음을 알렸고요.

잦은 편성 변경은 글로벌 OTT 등장 이후 제작비가 상향평준화되는 추세와 맞물려 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경성크리처’는 700억 원대, 디즈니+ 드라마 ‘무빙’은 500억 원대의 제작비가 들었다고 하죠. 높은 제작비는 편집·시각특수효과·색 보정·사운드 등 후반 작업에 공을 들이는 제작 시스템을 만들고, 이는 소위 ‘때깔 좋은 드라마’를 만들어냅니다. ‘정년이’는 회당 20억 원의 제작비가 들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이러한 제작비 이슈는 법정 분쟁으로 이어졌지만 결국 방영 이후에는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반드시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에 따르면 방영일 기준으로 국내 드라마 제작 편수는 2022년 141편에서 2023년 123편으로 줄었고, 올해는 그보다 더 줄어든 107편에 그칠 것으로 예상됩니다. 촬영을 모두 마쳤음에도 편성 대기 상태에 있는 ‘창고 드라마’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죠. 어디선가 순환이 가로막힌 겁니다. 그러는동안 방송사와 OTT는 스포츠 중계나 예능 제작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요. 

그러니 무언가가 빠르게 뜨고 또 빠르게 사라지는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 ‘정년이'를 권합니다. 이야기 내부에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 여성국극과 새로운 미디어 간의 경합 구도를 보여주는 반면, 이야기 바깥에서는 드라마의 편성과 관련하여 동시대 콘텐츠 업계의 급변하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뉴니커 여러분은 화제의 드라마 ‘정년이’를 어떻게 보고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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