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즘] 나는 내 엉덩이가 선택되기를 바랐다
작성자 구
책과 반성회
[엉덩이즘] 나는 내 엉덩이가 선택되기를 바랐다

😭 통곡의 탈의실
내가 처음으로 내 몸이 싫다는 감정을 느낀 건 초등학교 6학년 때, 첫 수학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옷을 사러 간 날이다. 내가 입고 싶었던 건 다리에 쫙! 달라붙는 스키니진. 하지만 내 허벅지에 맞는 스키니진은 없었다. 허벅지에 맞는 스키니진은 허리가 너무 남았고, 허리에 맞는 스키니진을 입으면 종아리부터 들어가지 않았다. 탈의실에서 여러 벌의 스키니진을 갈아입으며 눈물을 흘릴 때 엄마가 옷 가게 직원분과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딸 허벅지, 엉덩이가 엄청 크거든요. 쟤는 저런 바지 안 어울리는데 그렇죠?"
죽었다 깨어나도 소녀시대, 원더걸스처럼 얇은 일자 다리를 가질 수 없을 것이란 걸 느낀 그 순간 눈물이 쏟아졌고 탈의실에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엉덩이즘>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작가 헤더 라드케도 나처럼 '탈의실'에서 겪은 슬픔과 수치심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몸을 묘사한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니 친밀감이 느껴질 정도로 비슷한 이야기였다.
👏 인생의 첫 엉덩이 찬사
나는 내 몸을 설명할 때 항상 '하체 비만'이라는 단어를 줄곧 사용해 왔고 그게 나를 표현하는 가장 정확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내 하체는 항상 가려야 하는 것, 실루엣이 절대 보이면 안 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바지들은 통이 넓었고 치마의 길이는 무조건 발목까지 내려와야 했다. 내 인생에 반바지, 스키니진, 짧은 치마는 있을 수 없었다.
3년 전, 친구와 여행을 가는 날, 편안함을 위해 발목까지 오는 길이의 얇고 잘 늘어나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었다. 원피스를 샀을 때보다 약 5~6kg 찐 상태라 상체, 하체 모두 조금 달라붙었다. 친구를 만나러 가면서도 '옷을 갈아입을걸'이라는 생각을 백 번쯤 했다. 멀리서 걸어오던 친구는 나를 보며 놀라더니 한 마디 했다.
"뭐야! 구 엉덩이 완전 섹시하잖아!"
거짓말하지 말라며 대답을 얼버무리고 칭찬을 넘겼다. 그런데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내 엉덩이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기분이 좋았다. 내 엉덩이가 진짜 섹시한 것인지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어보고 싶어졌다.
나는 다른 사람들(특히 남자들)이 내 몸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다고 스스로 타일렀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상관 없을 리 없었다. 수치스럽고 흉측하게 느껴졌던 내 몸의 일부가 갑자기 누군가가 제일 마음에 들어하는 부분이 되었다. 나는 오로지 내 몸을 내세워 칭찬받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분명히 몸을 칭찬받고는 싶었다.
- <엉덩이즘> 일부 발췌 -
지금까지 난 내 엉덩이가 제발 다른 사람들 눈에 뜨지 않기를, 아무도 내 엉덩이의 존재를 알지 못하기를 바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 엉덩이가 최악이 아니라고 누군가 말해주기를, 누군가에겐 찬사를 받을만한 엉덩이이기를, 그 엉덩이를 누군가가 '선택'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 진짜 트워킹 전도사, 아니 교육자
나는 '이기 아잘레아'를 통해 처음 트워킹을 알게 됐다. 흑인, 동양인 등 다양한 인종 차별 발언, 그리고 호모포비아 발언을 공개적으로 트위터로 올렸었던 그였기에 뮤직비디오도 불편한 심기로 보게 됐다. 클로즈업 엉덩이들, 그리고 노래에 맞춰 위아래, 또 양옆으로 크게 흔들리는 엉덩이들. 그런데 흔히 말해 섹시하다거나 매력적인 게 아니라 '이상했다'. 인간의 엉덩이가 인간의 엉덩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엉덩이즘>은 글쓰기 모임을 함께하는 한 친구가 추천해 준 책이었는데, '저항 정신이 담긴 트워킹'이라는 소개 문구가 눈에 띄었다. 트워킹? 내가 아는 그 트워킹? 거기에 저항 정신이 있다고? 내가 의아하다는 말을 남기자 글쓰기 모임의 또 다른 친구가 트워킹은 큰 엉덩이로 인해 동물 취급을 받은 흑인들의 한풀이로 시작된 문화라고 알려줬다. 무지함에 부끄러웠다.
미나즈는 “베이비 갓 백”의 여성들과 달리 머리 없이 회전하는 몸이 아니라, 음악을 창조하고 이미지를 통제하며 돈을 버는 장본인이다. 착취가 일어났다면, 그건 자기 착취이자 미나즈 본인이 내린 선택이다.
- <엉덩이즘> 일부 발췌 -
<엉덩이즘>을 읽고 난 뒤 난 이제 트워킹을 볼 때마다 콩고 광장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일요일마다 콩고 광장에 모인 노예들이 모여 춤을 추고 새로운 문화 형식을 창조하며 식민지에 반발했던 예술적 저항이었던 춤.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트워킹을 단순히 이목을 끌기 위해 엉덩이를 흔드는 저급한 춤이라고 누구라도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트워킹을 보는 사람뿐만 아니라 트워킹을 추는 사람 또한 이 춤을 농담처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뭘 그렇게 춤을 힘들게 보냐고, 누가 트워킹의 역사를 알려주면서 가르쳐주기라도 하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빅 프리디아'라는 사람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고!
빅 프리디아는 단순한 트워킹 전도사가 아니다. 그의 바운스는 역사와 트워킹의 뜻, 역사와 유래에 대한 정보를 퍼뜨리며 지난 10년 동안 퍼져나간 오해와 잘못된 해석을 바로잡으려는 교육자이기도 하다. 프리디아의 작업을 보면, 지금 유행하는 대중적인 트워킹이 이 춤의 역사를 부인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다. 트워킹은 본디 저항, 즐거움, 섹스와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유행이나 노골적인 성적 표현, 단순한 움직임 정도로만 여겨지고 있다.
- <엉덩이즘> 일부 발췌 -
🤔 내 몸의 수치심은 어디서, 왜 왔는가
첫 엉덩이 찬사를 받은 이후로 나는 내 엉덩이를 감춰야 한다는 생각에서 잠시 벗어났다. 엉덩이의 굴곡이 잘 드러나는 레깅스를 입거나 달라붙는 치마를 자주 입었다. 그리고 친구들과 클럽에서 트워킹도 췄다. 파트너도 엉덩이가 매력적이라는 말을 해주니 기세등등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 엉덩이를 알아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태원의 한 클럽 입구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내 엉덩이를 탁! 치며 윙크를 하고 상스러운 말을 한 날, 난 다시 내 엉덩이를 온 세상 사람들의 눈에서 보이지 않게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 엉덩이를 싫어했다가 좋아했다가 또 싫어하게 되었는데 정작 '엉덩이'에 관해 심도 있는 고찰을 하진 않았다는 게 나와 작가인 헤더 라드케의 매우 큰 차이점이다. 그는 그가 느낀 수치심을 면밀하게 관찰했고 그 수치심의 근원을 파헤쳤다. 엉덩이에 관해 하나도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그가 한 행동 덕분에 나도 책을 덮으며 한번 더 다짐하게 됐다. 내 몸의 수치심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직시하기로 했다. 엉덩이를 싫어했다가 좋아했다가 하는 알 수 없는 이유를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떤 문화에서 기인했을지, 어떤 것을 보고 배운 것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더 명확하게 날카롭게 알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그가 말한 것처럼 '현재를 살아가는 모두가 미래를 빚어나갈 방법을 알아낼 수단'을 찾을 수 있게 되겠지!
출처: <엉덩이즘> 헤더 라드케 (RHK출판), 원제는 BUTTS: A Back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