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편: 타인의 인정을 꼭 받아야 하나요? (Feat. 자아실현)
지금까지 글을 계속 따라온 독자라면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완전히 동의하진 않지만, 존중한다. 이게 개개인의 다양성과 다원성의 존중이자, 특정한 누군가의 자기표현이라면 이것 역시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생각은 현대 개인주의에서 통용되고 있는 사고방식과도 잘 들어맞기도 하다. 이것이 곧, 고통은 최대한 회피하고 즐거움은 최대한으로 가져가려는 경제적인 인간상일 수 있다.
다만 "자아실현"이라는 용어와 연결시키면 조금 다른 대답이 필요하다. 내가 갖고 있는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발휘한다는 건, 분명 몰랐던 자기 자신 깨닫는 것과도 긴밀히 연결된다. "내가 이걸 좋아했구나!", "내가 이걸 잘했구나!", "내가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 "내가 태어난 이유가 이것 때문이진 않을까?!" 등의 감탄과 함께 새로운 자기 자신으로 꾸준히 거듭나가는 과정은 곧 자아실현(Self-realization)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볼 때, 이미 내가 알고 있는(or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운더리 내에서 좋은 것만 추구하고 싫은 것은 피하려고 하는 태도는 실제로 그것이 가능한지도 의문이지만, 이미 익숙한 쾌락과 익숙한 즐거움만을 누리려는 것일 거다. 어쩌면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표현도 이를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 속에서 치킨을 즐기는 익숙한 행복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행복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자아실현은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도전(Challenge)과 모험(Adventure)의 키워드와 잘 달라붙는다. 만약에 익숙한 상황과 환경, 관습에만 놓여있다면 나는 어쩌면 틀에 박힌 삶 속에서 틀에 박힌 선택만을 하게 될 것이고 여기에 새로운 변화와 가능성은 기대하기 힘들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익숙함 속에서 벗어나서 낯섦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되면 나는 기존과는 다른 판단을 하게 되고 기존과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내가 모르는 결과들이 나타날 것이고, 내가 그동안 고통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즐거움으로 변모하는 순간들이 이어질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인생의 목적으로서 행복이라는 개념은 소확행의 행복이 아니라, 자아실현에서 이야기하는 행복에 더 가깝다. 자아실현은 무한히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고 나를 알아가는 행복도 무한히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자아실현에는 타인이 필요할까? 그리고 타인의 인정이 필요할까? 타인과 상관 없이, 타인의 눈치 따위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는 게 자아실현이 아닐까? 앞선 논의와 연결 지어 보면 여기에는 어느 정도 설명이 더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자아실현은 자기 자신의 확장(Expansion)의 개념이다. 자기 자신의 세계에 갇혀 그 속에서 같은 자리만 맴도는 것이 자아실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세계를 외부로 뻗어서 확장해나가는 활동을 말한다. 이것은 분명 실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며 앎의 확장과도 연관된다.
자기 자신의 확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 타인의 인정(Recognition)이다. 타인들의 인정은 곧 공동체의 인정, 사회의 인정과도 연결된다. 사회가 나의 활동을 용인한다는 것은 내가 활동할 수 있는 바운더리가 더 커진다는 것을 말한다. 나는 타인과 사회가 세워놓은 벽에 가로막히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사회의 인정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자기 자신을 만들어갈 수 있다.
또한 앞서 이야기했듯이, 자아실현은 내가 몰랐던 나를 알아가는 것과도 연관된다. 미지의 영역과 모험의 영역이 필요한 이유는 내가 해본 적 없는, 몰랐던 경험과 체험을 해보는 것에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늘 새로운 타인이 존재한다. 이 타인은 내가 그 전에는 잘 알지 못했던, 나아가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해줄 수 있는 타인이다. (사랑 역시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하나의 예시를 들어보자. 번지점프는 처음 입문자가 혼자서 시도하기에는 너무나도 무서운 스포츠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이때 친구(타인)와 함께할 수 있다면 어떨까? 같이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려움과 겁은 집어넣고 그래도 시도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만약에 번지점프를 친구랑 함께 했다면 그 설렘과 떨림의 순간들을 서로가 이야기하면서 공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함께 패러글라이딩, 행글라이딩 등을 계획하며 도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재롱을 떨 때 부모님이 칭찬을 해주고 인정을 해주면 더더욱 신이 나서 애교를 부리던 그런 모습이 우리에겐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런 부분에서 자아실현에서 타인과 타인의 인정은 분명 필요하다.
그렇다면 앞서 이야기한 자아실현과는 모순되어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익숙한 이 테제,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 된다." 가 왜 나왔는지에 대해 조금 더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그 전에 잠깐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제 타인의 인정을 두 가지로 나누어보자.
첫 번째 인정은 그냥 자기 자신을 죽이고 기성세대에게 좋은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일 수 있다. 부모님이 하는 말을 잘 듣고 지금 사회가 좋다고 이야기하는 것들을 충실히 잘 따르는 것이다. 여기서도 좋다고 잘한다고 평가 받는 인정은 나타난다. 내가 어렵다고 여겨지는 시험에 합격하여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직장에 들어가게 되면 사회로부터 잘했다는 평가가 따라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새로운 가치의 창출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직 기존의 가치들을 공고화하고 고착화시킬 뿐이다.
두 번째 인정은 지금 사회가 좋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창출하여 타인에게 새롭게 인정 받게 되는 창조적인 영역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의 인정은 기존의 관점에서 좋고-나쁨의 판단 잣대에서의 인정이 아니라 그 선입견의 잣대를 뒤흔들어버리는 인정이다. 사회에서는 인정하지 않았던 영역에 대해 결과를 내버려서 새로운 인정을 불러일으키는 그 영역이 있다. 사회는 이 영역에 대해서 인정하고 새로운 자리들을 마련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걸 목격하고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 역시 동기부여를 받아 자기확신을 갖고 새로운 가능성과 돌파구의 영역을 만들어 세계를 지속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영역이 계속 열리게 된다.
자아실현이라는 것이 기성세대(or 타인, 사회)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아나서는 거라고 이해한다면 이는 두 번째 인정과 연결된다.
이렇게 우리가 이해할 때,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 된다."라는 것을 새롭게 해석한다면 여기서 타인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가로막는 기존의 타인일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 기존의 타인이라는 건 일단 잠정적으로 거리를 둘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이 기존의 타인에게는 추후에라도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또 지속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타인이 아닌, 또 다른 타인이 필요할 수 있다. 이 또 다른 타인과는 교류를 하고 도움을 받으면서 자아실현을 이뤄나가게 된다. 그렇다. 여기서도 타인의 인정이 요구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타인은 요청된다. 물론 타인에게 100% 공감 받고 이해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장폴 사르트트가 말했듯이 타인은 지옥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내가 타인과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면, 자기 자신에게 기만이나 위선이 없는 진정한 모습을 보이고 싶다면, 대답이 달라질 것이다.
자아실현은 자기 자신에게 최고로 좋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타인과 공동체에게도 새로운 좋은 것들이 나타나는 지점이 된다. 이 영역을 우리가 계속 모색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