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편: 자기객관화가 정말 필요할까 | 객관적이라는 말이 대체 뭔데?
지난 글에서 팩트폭력이 엄밀한 의미에서 팩트(Fact)가 아닐 수 있다는 걸 이야기했다. 그리고 팩트폭력만큼이나 비슷한 뉘앙스를 띠면서 동시에 현대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용어에는 자기객관화와 메타인지가 있다. 이 표현들이 정말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을까?
자기객관화 먼저 살펴보자. 다음의 예시를 보자.
이 맥락에서 자기객관화라는 말은 자기 자신을 제3자적 시선(외부자적 시선)에서 돌아보라는 말에 가깝다. 지난 글 팩트폭력에서 이야기한 예시처럼, 내가 그 사람과 사귈 수 있는 외모인지, 능력이 되는지, 조건이 되는지 등을 총체적으로 계산하고 파악해 보라는 것이다.
위 대화 상황에서 "자기객관화 좀 해라."와 가장 유사한 맥락의 다른 표현이 있을까? 만약에 "주제 파악 좀 해라.", "네 분수를 알아라."라는 말을 곧바로 떠올리게 된다면 이 부분은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자기객관화라는 표현을 조금 더 분석해 보자. 객관은 무엇인가? 그리고 주관은 또 무엇인가? 객관적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더 나아가 우리는 주관적인 것보다 객관적인 것을 조금 더 중요시하는가?
먼저 대전제를 생각해 보자. 인간은 누구나 주관적이다. 이 말은 누구나 자신의 삶의 주체로서 자기 자신의 주관을 갖고 행동한다는 의미로 확장할 수 있다. 여기서 주관이라는 건 자기만의 관점, 시각, 기준, 가치관 등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객관은 무엇인가? 위에 곧바로 힌트가 있다. 객관은 제3자적 시선(외부자적 시선)을 의미할 것이다. 여기서 객관이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보자.
객관은 일상적인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믿음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곧 기존의 전통, 종교, 도덕, 관습, 법, 문화, 가치들에 기반해 있는, 사람들에게 만연화된 가치체계, 인식체계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믿음, 즉 선입견(Preconception)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러한 객관을 보통 정답처럼 생각한다. 나의 주관은 언제든지 틀리거나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설득력을 느끼며 이를 그대로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객관을 곧바로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적어도 인간사회에서 말하는 객관은 가변적이다. 왜냐하면 시대에 따라 통용되는 (옳다고 일컬어지는) 믿음은 변화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미인상과 지금의 미인상은 차이가 있듯이, 시대를 거쳐서 세대를 거쳐서 사람들의 생각과 선입견은 변화한다. 곧 객관 역시 변화하는 것이다. 객관이 정답이 되고 마치 진리가 되려면 그것이 고정불변하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객관은 분명 변한다. 그 말은 한편으로 "객관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내가 꼭 따라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남기게 된다. 자기객관화라는 것에 대해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옳다고 말하는 기준에 대해 나라는 자유로운 주체를 억지로 욱여넣는 건 아니냐?"라는 비판을 던질 수 있게 된다.
위 주관과 객관의 논의를 어느 정도 수용했을 때, 자기객관화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자기객관화 = 자기(주관)의 객관화
지금까지 가져온 맥락을 이어볼 때, 만약에 이 객관화가 나의 주관의 소멸을 이야기한다면 여기에는 모종의 폭력성이 전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마치 다수가 갖고 있는 힘으로 한 사람의 생각을 억누르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더 나아가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이 스스로가 자기객관화를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이냐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인간 모두가 주관적이라고 전제를 할 때, 자기객관화 역시 자신이 주관적으로 생각하여 만들어낸 객관적인 시선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을 보려고 하는 것일 텐데, 그것 역시 객관이라고 생각하는(착각하는) 또 다른 나의 주관이 아니냐는 말이다. 이 지점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기객관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 논의들을 모두 받아들였을 때, 자기객관화는 엄청난 위험성을 띠게 된다. 자기객관화는 결국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의 객관적인 기준과 잣대로 스스로를 억압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객관화가 (내가 만든) 사회적 기준이나 잣대에 의해서 나의 잠재성과 가능성의 영역에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상한선을 긋는 거라면, 자기 자신에게 주제 파악하고 분수에 맞게 살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하는 것까지 나아가게 된다면, 여기에는 오로지 주체의 무기력만이 남을 뿐이다. 한편으로 이걸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면 여우가 신포도 보듯이 "포도가 실 거야"라며 자기합리화하는 모습을 보이게 될 거라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
먼저 이와 같은 악순환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 해법 중 하나는 주관-객관의 이분법적 분절과 대립을 넘어 주관이 객관을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이행 구조로 바라보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객관이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구조라는 걸 이해하고, 객관이 단순히 주관의 합이라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나의 주관이 객관을 바꿀 수 있다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있다.
주관이 객관을 바꾼다는 말은 무엇인가?
이것이 대표적으로 주관이 객관을 바꾼 사례가 될 수 있다. 기존의 딱딱한 관습이 나의 주체적인 자기 표현에 의해서 새로운 (따뜻한) 관습으로 이행했다.
만약에 이 사례에서 자기객관화를 말한다면 그 집단의 관습과 문화를 그대로 내면화하여 나의 유도리와 융통성, 부드러움 등을 숨기고, 그 집단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은 자기 자신(주관)을 포기하는 일이다.
다만 위 사례에서 내가 그 집단의 문화적 분위기를 바꾸어냈다면, 이것은 주체(주관)의 힘이 발휘가 된 거고, 그것이 곧 새로운 문화를, 변화를 창출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예시를 들어보자.
여기서 볼 수 있는 나의 태도는 이 시대의 통용되는 객관을 거부하려는 태도이다. 나는 기존의 가치(돈)를 거부하고 자신의 가치(사람)를 추구하려고 한다. 분명 이 사람의 인생은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고난과 시련을 반복하겠지만, 이 사람이 지키고자 했던 것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이 사람의 진정성이 있는 삶의 서사(Narrative)가 사람들에게 풍성하게 교류되고 공유될 수 있다면, 세상이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가치관이 사람들에게 스며들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변화를 찾을 수 있다. 눈치가 빠른 분들은 이제 알 것이다. 예술의 역할은 위 예시처럼 사람들의 선입견(객관)을 부수고 뒤흔드는 데 있다는 것을 말이다.
맨 처음의 사례로 돌아가서 만약에 A가 저 애랑 사귀게 된다면 B를 포함한 사회적 선입견을 부수게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A가 저 애랑 사귀는 거 이상의 다른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아주 특별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것 역시 하나의 새로운 가치 창출이 되어, 주관이 객관을 변화를 만드는 데 영향을 줄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래와 같은 생각이 나온다.
객관에서 출발하여 객관을 주관에게 주입하고 강요하는 것(자기객관화)이 아니라,
주관에서 출발하여 객관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것(가치창출)이 더 윤리적이다.
그리고 현대 윤리학과 정치철학은 정확히 여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현대에서는 메타인지(Meta-cognition)라는 용어도 자기객관화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식의 메타인지의 원래의 의미는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스스로가 검토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 안의 무지를 검토하여 지적인 겸손을 유지하려는 태도적인 문제에 가깝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메타인지는 앞전의 글에서 강조한 진실성과 맞닿게 된다. 메타인지는 곧 자기 물음을 통해 스스로를 의심하면서 자기 진실성(진짜 앎)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 사례의 A의 입장에서 메타인지라는 건 뭘까? 그것은 "내가 정말로 그 사람을 사랑하는가?", "나는 진정으로 그 사람과 함께하길 원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검토하는 걸 의미할 것이다. 만약에 내가 아무리 의심을 하더라도 내가 진짜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다면 그것이 나의 진실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진짜 앎이다. 그리고 그 확신이 생겼을 때 용기를 내볼 수 있다. 설령 내가 그 거절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과정과 선택 속에서 진실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이다.
위의 과정을 A가 거쳤다면 A는 메타인지를 안 한 것이 아니다. A는 진정한 의미에서 메타인지를 이미 진행한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메타인지의 개념을 이렇게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메타인지와 비슷한 용어로 자기객관화라는 용어 대신에 반성(Reflection)이나 관조(Contempl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반성이라는 건 자기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기준을 수정해 나가는 것까지를 의미할 것이며, 관조라는 건 반성을 넘어서 구조적인 부분까지 확장하여 전체를 포착하고 공동 세계를 모색하는 것이 된다. 반성에는 '나'가 강하게 전제되어 있고, 관조는 '나'를 시작으로 하여 타인과 공동체로의 확장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여전히 엄밀한 의미에서의 객관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다. 반성과 관조는 여전히 인간의 주관의 문제이고, 주관의 확장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
(*한편으로 나의 주관과 타인의 주관이 만나 공통분모를 형성하는 영역을 우리가 "상호주관"이라는 표현으로 이해한다면, 어쩌면 객관이라는 말이 함유하고 있는(특히 자연과학에서) 절대적이고 정답과도 같은 뉘앙스를 지울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