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편: 저렇게 선한 사람이 악행을?ㅣ성선설과 성악설로 알 수 없는 것들
작성자 모엘
모엘의 단상
12편: 저렇게 선한 사람이 악행을?ㅣ성선설과 성악설로 알 수 없는 것들
지난 글에 솔직함과 진정성(진실성)은 다를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글을 끝냈다. 그렇다면 진정성이라는 건 무엇인가?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해묵은 철학적 논쟁 중에 성선설과 성악설이 있다.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악설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왜냐면 현실에서는 분명 수많은 악행들이 자행되고 있다. 이 악행들의 뿌리를 추적해 보면 인간에게 악한 본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수많은 악플들은 자신을 숨기는 인간이 얼마든지 누군가를 혐오하고 증오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에 우리가 그런 모습을 "솔직함"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게 된다면 아마 성악설이 맞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악의 실마리가 내재되어 있고 이것이 어떤 특수한 상황이나 조건에 의해 발현된다면 말이다.
그러나 "진정성(진실성)"이라고 말한다면 조금 다른 대답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만약에 내가 특정 타인을 혐오하고 증오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전에는 내가 타인과 함께 잘해보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것이 배신 당했기에 누군가를 더욱 혐오하고 증오하는 건 아닌가? 내가 주어진 상황에서 자기 "진정성(Authenticity)"을 갖고 정말로 최선을 다해보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되었기에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풀이와 분풀이를 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 자기 자신을 회고적 관점에서 돌아봤을 때, 내가 악한 마음을 갖기 바로 이전의 나의 상태를 바라본다면 거기에는 "진정성"이 있을 수 있다. 누구나 악한 마음 이전에, "진정성"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면 우리는 성선설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쯤에서 볼 때 얼핏 보면 성악설처럼 보이고 얼핏 보면 성선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용어는 성선설과 성악설로 포괄할 수도 없고 성선설과 성악설은 매우 순진한(Naive) 구분 방식이다. 성선설과 성악설을 비판해야 진정성이 무엇인지가 보인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인간에게 내재한 선과 악이라는 "고정불변한 속성"이 있다고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 말은 선과 악의 실체를 상정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 질문을 할 수 있다. 선(善)과 악(惡)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것을 과연 언어를 통해 이분법적으로 단칼에 규정 짓고, 구분할 수 있는가? 선과 악은 분명 시대적으로 변하는 개념일 것이다. 과거에는 선했던 것들이 현대에서는 악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과거에 악했던 것들이 현대에는 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공동체의 성원들에게 인정 받기 위한 투쟁도 이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종교전쟁과 같은 경우는 자신들이 선(善)이고 정의이며 상대방은 악(惡)이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 일어나는 거라면, 그 시대에 선과 악을 제3자적 시점에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과연 무엇이 진짜 선이고 무엇이 진짜 악일까? 그래서 선과 악은 유동적인 개념으로 봐야 한다. 선과 악을 고정불변적 속성으로 보는 접근은 분명 잘못되었다.
더 나아가 선과 악이라는 관념이 어떠한 실재하는 관념이 아니라, 인간이 그저 필요에 따라서 의미를 부여한 개념이라고 생각해보자. 인간에게 어떠한 본성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선과 악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이전의, 그 무언가가 아닐까? 우리는 선과 악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그 이전의 무언가를 가지고 선과 악이라고 의미를 붙이고 있는 건 아닌가? (선과 악의 개념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선과 악은 도덕과 법의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필수적이다. 다만 인간의 선천적인 본성을 후천적인 개념(선과 악)으로 곧바로 규정해버릴 수 있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일 수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관점을 비틀면 또 다른 가능성이 보일지도 모른다.
앞선 논의를 가져와보면 선과 악은 실체가 없다. 그리고 인간은 늘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인간은 늘 선택을 해야만 한다. 이것엔 정말로 누구나 얄짤이 없다. 그리고 그 선택은 늘 타인에 의해 평가되며 선/악(좋고 나쁨) 등의 가치판단을 받게 된다. 즉, 인간의 선택에는 늘 선과 악이 들어와있다. 선과 악은 늘 인간을 따라다닌다.
이렇게 보았을 때,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과 절대적으로 악한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선하고 어느 정도는 악하다. 누구나 선할 수 있고 악할 수 있다. 이 관점이 지금의 우리의 현실을 더 잘 설명하지는 않는가?
이제 선악의 문제에 대해서 더 깊게 들어가보자. 인간의 선택에 선과 악이 따른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좋은 마음으로 한 거면, 모두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인간의 선택의 이전에는 "의도(Intention)"가 있고, 선택 이후에는 "결과(Result)"가 있다. 인간은 어떠한 의도를 갖고 선택 및 행위를 하고 그것에는 늘 결과가 따른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아주 재미있고도 힘든 부분은 의도와 결과가 곧잘 분리된다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무언가를 했더라도 그것이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내가 생각한 의도와 결과 사이에는 "우연적인 상황과 변수"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내가 최대한 예측하고 고민해서 내린 결과가 곧장 빗나가버려서 누군가를 때릴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왜 누군가에게 오해를 받는가? 우리가 왜 누군가에게 분노를 사는가? 의도는 보통 눈에 보이지 않는다. 결과는 눈에 보인다. 내가 내놓은 결과(보이는)에 의해 평가를 받으면서 나의 의도(보이지 않는)가 곡해된 게 아닌가?
(근대 윤리학의 양축인 의무론과 공리주의는 각각 의도와 결과로 양분하여 주목한 철학이었다. 의무론은 의도가 오직 '선의지'로서의 행위를, 공리주의는 더 큰 쾌락(행복)을 가져다주는 결과로서의 행위를 강조하였다. *다음에 기회된다면 해당 내용을 본격적으로 다뤄보자.)
앞선 논의들을 종합해 볼 때, 인간 본성이 그저 선하고 악하다고 규정 짓는 것은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인간의 선택에 선과 악이 그저 혼재해 있다는 것만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여전히 부족하다. 나 역시 순간 저질러버린 실수에 의해 타인으로부터 악한 사람(나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여전히 곤란한 지점이 있다.
그래서 현대 윤리학에서는 진정성(진실성)이라는 개념을 말한다. 이 진실성은 선과 악의 단순 이분법 구도를 보완할 수 있는 개념이다.
아마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선과 악은 아무래도 가시적인, 결과적인 측면들을 이야기하기 쉬울 것이다.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악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행위를 하지 않도록 한다. 행위를 하지 않으면 남에게 피해를 끼칠 일도 없고 그것에 대해 책임질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객관적인 관점에서 선과 악의 결과적 구분이 아니라, 주체의 관점에서 자기기만과 자기진실성의 관점으로 봐보자. 자기 자신을 다른 것들로 자꾸 포장하고 꾸며내려 했는지, 자기 자신의 진정성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려고 했는지의 관점으로 따져보자.
여기서 자기진실성이라는 건 자신의 내면에 위선과 가식을 모두 없앤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폴 리쾨르식으로 이야기하면 아무리 의심하고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것, 아무리 부정하고 부정해도 부정할 수 없는 것들이 이러한 나의 진실성을 형성한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비난을 하던 간에 나에게 진실하고 진정성이 있는 것들이었다고 한다면, 내가 할 수 있고 해낼 수 있다는 자기확신을 갖고 행한 거라면, 다른 사람들의 비난과 평가는 감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이상으로 그것은 나에게만큼은 한치 의심 없이 소중했던 것이고, 나는 나 자신을 온전하게 그대로 드러내었으며, 이것이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러한 결과들에 대해서도 마땅히 책임져나갈 수 있다.
눈치 빠른 분들은 알겠지만, 이것은 곧 실존주의를 말하고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와 같은 실존철학자들은 이러한 본래성(진정성)을 강조한다. 이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다른 무언가(타자)에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본래적인 물음을 던져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나서 불확실한 미래로 나를 내던지는 것이다.
"내가 대체 왜 이렇게 살았을까?", "이게 정말 내가 원했던 삶일까?", "나는 그저 타인들에게 있어서 좋아 '보이는' 삶을 산 거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나의 삶을 살진 않은 건 아닐까?"와 같은 존재론적이고 실존적인 나의 고민은 지금의 내가 아닌, 또 다른 자기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내가 만약에 이렇게 늘 자기 자신을 회고하고 반성하면서 자기 진정성이 있는 선택을 해왔다고 했을 때, 이것을 단순히 선과 악으로 판단하는 건 좀 어불성설 아닌가? 우연적인 상황과 변수를 인정하되,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고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려고 한 선택에 대해서는 우리가 조금 달리 바라봐야 하지 않는가?
이제 우리는 다시 말할 수 있다.
타인의 관점에서 그저 선하냐 악하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 진실했느냐 진실하지 못했느냐를 물을 수 있다. 내가 진실했다고 하는 말은 내가 자기확신을 갖고 선택을 했다는 걸 의미할 것이고, 이에 뒤따라올 예기치 못한 결과마저 마땅히 책임을 질 거라는 걸 이야기를 할 것이다.
순전한 악(惡)도 아닌, 가식적인(자기기만적인) 위선(善)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본래적인 온전성(진실성)으로 우리가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면, 분명 우리는 기존과는 사뭇 다른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기존의 선과 악에 대한 판단과 선입견마저 뒤집어 엎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가능성을 바라봐야할 것이다.
우연적인 상황 속에서 늘 자기진정성이 있는 선택을 해오며 결과에 대해 책임져 온 사람이 어쩌면 새로운 의미에서 진정으로 선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