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편: 도덕의 붕괴+강력한 도덕주의=현대 사회?ㅣ수치심이 혐오가 된다
작성자 모엘
모엘의 단상
7편: 도덕의 붕괴+강력한 도덕주의=현대 사회?ㅣ수치심이 혐오가 된다
현대 사회는 빠르게 개인주의로 이행해왔다. 빠르게 변해가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나"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그 누구도 대신해서 나를 지켜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각박하고 험난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능력을 갖춰야 하고 경쟁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관점을 쭉 따라가보면 과거의 공동체 중심의 전통적 가치는 이제 더 이상 쓸모가 없다. 지금 우리는 마치 각자도생과 같다. 허울 뿐인 형식이나 허례허식은 현대 사회에서는 효율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유용성이 전혀 없다.
그래서 어쩌면 현대의 자유주의에서 우리는 "권리(Right)"를 가장 우선시한다.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하는 것을 먼저 찾아야 한다. 나와 비슷한 옆의 누군가가 누렸으면 나 역시 반드시 누려야 한다. 나는 많은 희생을 하며 힘들게 살고 있기 때문에, 더 나아가 나는 공동체 및 국가로부터 많은 피해를 받았기 때문에 마땅히 이러한 권리들을 누릴 자격있을 것이다. 이 안에서 과거의 선조들로부터 만들어져 이어져 온 유산이나 제도, 시스템들에 대한 감사함은 사라진다.
그리고 도덕의 붕괴는 대략 이 지점에서 일어난다. 지난 글에 언급했었던 것처럼 지금의 자유주의식 도덕이 오직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무엇이든 허용된다."로만 작동한다면 여기서의 도덕은 매우 최소치의, 협소한 도덕이다. 그저 현재적 시점에서 당장의 실리적인 자유만을 추구하고, 개인의 선택과 책임만을 중시하다보면 과거의 전통과 역사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일이 없다. 지금 나는 내가 가장 중요하고 나의 생계가 제일 중요할 뿐이다.
도덕이 붕괴되었다고 이야기를 하는 건 결국은 과거의 가치와 지금의 가치를 연결시켜 보려는 사유를 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과거의 것들은 언제나 현재적 시점의 우리에게 하나의 근거할 수 있을 기준을 제공해준다. 그 과거의 것들과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또 다른 중용점을 마련했을 때, 기본적으로 사유가 작동하고 그러한 선택이 내 행위의 고유한 의미가 된다.
예를 들어 과거부터 이야기해 온 지조나 절개, 정절에 대한 부분은 조상들이 표방해왔던 하나의 도덕관이었다. 현대인들이 만약에 이러한 부분들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적절한 중용점을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유용하고 결과적인 것들만을 좇으며 자기 자신의 권리만을 요구하게 된다면 도덕은 작동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행위의 의미 영역은 없고 오로지 욕망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안에서 다시, 당장 좋은 걸 얻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다.
그렇게 남아버린 지금의 자유주의에서의 최소치의 도덕은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가 된다. 내가 내 권리를 주장해야 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관점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그것이 강력한 도덕주의가 된다.
타인이 나에게 해코지를 하고 해악을 끼쳤을 때 이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도덕의 이름으로 요구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이때 내가 그 타인에게 어떠한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다면 나의 수치심을 가리기 위해서 더 강력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수 있다. 이때 도덕은 내가 모종의 우월감을 얻기 위한 효율적인 수단이자 장치로 전락한다.
지독한 경쟁 사회 속에서 우리는 세상과 사회로부터 모종의 수치심을 느낀다. 더 나아가 내가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을 느끼며 자존감의 붕괴를 경험한다. 이때 우리가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보다 더 쉽게 의지하고 의탁할 수 있는 영역이, 바로 "도덕"이 된다. 나의 상처 받은 자존감을 보호하고 타인에 대한 질투를 정당화하기 위해 도덕적인 영역에서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공자와 예수, 소크라테스는 모두 부모가 잘못을 했을 경우 이를 곧바로 신고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모두 의문을 던졌다. 도덕주의적 관점을 잠시 접어두고 각 상황 속에서 행위의 의미를 고려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피의자의 특수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 결과만 놓고 즉각적으로 강력한 처벌만을 요구한다면 어떠할까?
그것은 어쩌면 나의 무기력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발버둥질이 아닐까? 자칫하면 내가 죽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더욱 도덕적 관점에 의존하는 거 아닐까? 마사 누스바움은 나의 수치심이 다른 사람에게 전가될 때 혐오로, 더 나아가 마치 죽여야 하는 사람으로 내모는 증오의 형태로서 나타나게 된다고 말했다. 그것이 정의와 도덕의 이름으로 위장된 형태라면 지금의 사회는 분명 위태위태할지도 모른다. 조금 더 생각해본다면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은,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을 명확히 찾은 사람은, 남을 혐오하고 증오할 이유가 없다. 맹목적인 혐오와 증오보다는 연민을 통해 어떤 구조적인 조건과 상황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발생했는지를 고민해보고 사유해보는 것이 조금 더 "윤리"적일 것이다.
도덕을 말하기 이전에 윤리라는 것이 자기 확신을 통한 진정성을 모색하는 과정을 말한다면 어떨까? 단순히 당장 나에게 좋아보이는 것에 의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진정성의 측면에서 지금의 공동체와 새로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윤리적 주체의 모습이라면 어떨까?
이는 과거의 전통과 도덕을 그대로 복원하여 반복하라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현재적 상황과 여건에 맞지 않는 과거의 것들을 현재에 억지로 들이대고 적용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과거의 것들은 현재적 시점에서의 내가 참조하고 재해석할 수 있는 풍부한 내용물이 된다. 과거의 나의 경험과 기억들 역시, 또 다른 자기 자신을 찾아나설 수 있는 훌륭한 원천이 된다. 그것을 바탕으로 타인과 함께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 지속적으로 확장해나갈 수 있다면 그것이 새로운 나를 만들게 될 것이다. 그게 진정한 의미에서의(윤리적 의미에서) "자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