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갈등론에서 기능론으로 ㅣ 인문학으로 바라본 사회학적 관점
작성자 모엘
모엘의 단상
3편: 갈등론에서 기능론으로 ㅣ 인문학으로 바라본 사회학적 관점
고등학교 사회탐구 과목 중 사회·문화는 사회학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리고 사회·문화 과목에서 전 주제를 관통하듯이, 사회학에서는 사회를 바라보는 두 가지 거시적 관점을 기능론과 갈등론으로 정의하고 있다.
대략적으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단순 도식으로 표현하는 것엔 다양한 맥락을 놓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참고만 해주세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학창시절에 사회 과목에서는 기능론과 갈등론을 매우 건조하게 다룬다. 이 말은 이 영역을 이론적 관점으로 다루되, 실천적 관점을 배제하고(어떠한 가치도 배제하고) 오로지 중립적으로 가르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 사회학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에 대한 이유는 분명 많이 있다. 사회학이라는 건, 학문이라는 것이 다 그렇듯이 최대한 객관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인식 때문이고, 삐끗하면 이 부분은 굉장히 정치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학교에서 다양한 가치를 교류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이 영역을 더욱 정치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보는 쪽이다.)
내 강연록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인문학은 철저하게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인문학은 철저하게 가치(Value)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관점으로 인문학으로 사회학을 바라보게 된다면 이 또한 정치적 접근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능론과 갈등론을 인문학적으로 분석해 보자.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지만 기능론은 보수·우파이고 갈등론은 진보·좌파이다. 기능론부터 보자.
기능론은 일반적으로 사회유기체적인 관점을 띠고 있다. 사회가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있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면 다른 사람들은 이 무언가의 덕을 누릴 수 있다. 플라톤이 이상국가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처럼 다양한 사회적 직능(기능)들이 유기적으로 결합이 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사회에서 모종의 활동을 하는 것은 곧바로 세상에서 말하는 선(善)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내가 사과를 수확하면 다른 사람들이 내가 수확한 사과를 먹을 수 있고, 누군가가 쌀을 재배하면 나는 그 사람이 재배한 쌀을 먹을 수 있다. 이 단순 구도가 기능론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재밌는 지점은 기능론은 사회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이미" 유기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사회 문제를 병리적인 현상으로 간주한다. 마치 유기체에서 발병한 암처럼 사회 문제를 여겨 그것을 마치 제거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여기서의 문제점 역시 사회는 전반적으로(전체적으로) "이미" 건강하다는 걸 전제하고 파편적인(부분적인) 문제만을 해결한다면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을 이야기하는 지점이다.
이 부분을 조금 더 확대 해석해보면 단점이 드러난다.
과연 우리 사회의 구성 요소들이 정말 완벽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이미 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사회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약자와 소수자들이 생길 일이 있는가? 이미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빈곤 계층에게 굳이 공공부조를 할 필요가 있는가? 더 나아가 만약에 인류 공동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전쟁의 참혹함을 겪는 사람, 지금도 기아 문제로 인해 허덕이는 사람이 존재할 이유가 있는가? 그럼에도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들의 희생 위에서 두 발 뻗고 있는 걸 당연하게 말하는 것 아닌가?
사회가 이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면, 이것은 마치 기득권(헤드)의 관점에서 정상성/비정상성을 이미 전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득권은 힘이 있는 자이다. 그들은 체제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자신이 갖고 있거나 갖게 될 것들을 재분배하기 원하지 않는다. 본인을 정상으로 규정하고 본인에 반대하는 것들을 비정상으로 규정한다면, 사회 체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사회 변혁은 일어나지 않는다. 솟아오르는 두더지는 망치로 때리면 그만이다.
그렇기에 기능론은 현실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기능론은 이상이다.
갈등론은 기능론에 대한 생각을 정면에 두고 맞선다. 갈등론자들에게 있어서 사회 문제는 불평등에 의해서 생겨난다. 사회는 이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사회는 그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뉘어 있으면서 갈등의 연속이다. 갈등은 바로 이러한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생겨난다. 마치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무산계급은 유산계급에 의해 착취를 당하고 있다.
이렇듯, 기능론에서 중요시 여기지 않거나 단순 문제시했던 약자와 소수자들의 문제는 갈등론에서는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사회의 유기적이지 않은 부분에서는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비주류인 이들이 자신의 이권을 챙기고자 하는 투쟁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이러한 갈등이며, 이는 기득권들을 위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득권들이 이들을 문제시 여겨(사회 병리적인 현상으로 여겨) 탄압하려고 한다면 어쩌면 그게 기능론과 부합할 수 있다.
갈등론자들은 이러한 갈등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사회에 뿌리내린 구조적인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본다. 갈등론자들이 이야기하는 사회 변화와 발전은 기술적인 진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불평등의 해결이다. 사회는 갈등과 투쟁의 연속이고 불평등은 끊임없이 해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다만 다소 어두운 이 관점은 현실의 좋은 점들을, 행복한 점들을 놓치기 쉽게 만든다. 나아가 기득권이 너무 공고하게 자리한 가운데, 어떤 집단이 강력한 투쟁만을 요구하게 된다면 무력한 개개인들은 이 문제 앞에서 파편화될 수 있다. 어쩌면 현재 대한민국의 젊은 사람들이 보수적이게 된다면 이 투쟁을 할 힘조차 잃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들이 어쩌면 불평등을 그저 인정하고 현 세태를 받아들인다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한편으로 갈등론자들이 어떠한 미래적 이념만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면 그만큼 힘 있는 자들을 악마화하기도 쉽다. 만약에 약자와 소수자들이 그들의 이권에 대한 투쟁에서 승리하여, 그들이 결국 기득권이 된다면 어떠할까? 한편으로 그들의 자리로 올라오려는 새로운 세대들의 자리를 위해 양보할 수 있는가? 아니면 기득권으로서 돈과 권력으로 다시 그들(새로운 세대들, 새로운 약자와 소수자들)을 탄압할 것인가? 이 순환의 매커니즘에 들어갈 가능성이 분명 있다.
갈등론은 어떻게 보면 현실이다. 그러나 갈등론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점은 갈등 그 자체가 마냥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갈등론은 다시 기능론을 전제해야 의미가 있다. 우리가 대립하고 투쟁하는 이유는 기능들의 유기적인 결합을 위해서여야 한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갈등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의 위치가 되고 갈등이 끝나면 의미가 없다.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어느 누구도 자기 위치에서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고 이를 지속적으로 엮어갈 수 있는 사회가 구현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이 갈등은 의의가 있다. 그래서 기능론이 이상이 되는 것이다.
즉, 갈등론은 기능론을 전제해야 의미가 있고 갈등은 기능론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 되어야 한다. 갈등론은 현실이고 기능론은 이상이 되어야 한다. 이상은 영원히 닿을 수 없을지라도 계속 나아가야 할 하나의 방향성이 된다. 반복하듯이 기능론을 현실 그 자체로 두어버리면 답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게 인문학적 관점이다.
그렇기에 기득권들은 사회적인(공동체적인) 관심과 책임감을 갖고 분배를 통해 기능들의 유기적인 결합을 만드는 것에 다소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약자와 소수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사회의 다양성과 다원성의 주체가 되어 미개척지를 열며 새로운 유기적 결합을 도모해야 한다. 그것이 개개인의 자유가 또 다른 질서가 되는 하나의 가능성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인문학 역시 이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기능론과 갈등론은 인문적 관점에서 비로소 이렇게 종합이 될 수 있다. 인문학이 다소 좌파적인 성향을 띠는 이유는 갈등론만을 지지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이 결국 진정한 의미에서 기능론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주장과 당위를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