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진격의 거인> "다들 무언가의 노예였다." ㅣ 니체의 위버멘쉬

2편: <진격의 거인> "다들 무언가의 노예였다." ㅣ 니체의 위버멘쉬

작성자 모엘

모엘의 단상

2편: <진격의 거인> "다들 무언가의 노예였다." ㅣ 니체의 위버멘쉬

모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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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imo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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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거인>이라는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은 꽤 많지만, 아마도 감상자들로 하여금 기억에 남는 대목을 꼽으라고 한다면 두 가지 대목인 것 같다.

첫 번째는 리바이가 여성형 거인 앞에 동료들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 주인공인 에렌에게 "에렌, 너와 우리의 판단 차이는 경험에 의한 것이다.하지만 그런 것에 의지할 필요 없다. 선택해라. 너 자신을 믿을 건지, 나와 이 녀석들 조사병단 조직을 믿을 건지. 난 잘 모르겠다. 늘 그랬지. 자기 힘을 믿든, 신뢰하는 동료의 선택을 믿든 간에 결과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스스로 선택하라" 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더 이야기하도록 하자.

두 번째가 오늘 할 이야기이다.

<진격의 거인>은 기본적으로 굉장히 진지하고 비극적인 배경을 깔고 간다. 상황이 도저히 정상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등장인물들도 하나씩 속된 말로 삔또가 나가있다.

그 말은 위 만화처럼 "무언가에 미쳐있다."라는 말이 된다. 이 표현에 대해서는 분석이 필요하다. 이 "무언가"라는 건 뭘까? 이 무언가를 다른 한 단어로 대체하면 그것은 바로 이상(ideal)일 것이다.

윤리학의 기본 구도도 이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현실은 비참하다. 그러나 이상은 아름답다. 윤리학은 현실에서 이상으로 나아가는 그 구도를 이미 전제해두고 있고, 그렇게 나아가는 사람이 윤리적인 인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에 미쳐있다."라는 말의 "무언가"에 대해서 이야기가 끝났으면, 이제 "미쳐있다"라는 말에 대해서도 분석이 필요하다. 분명히 이 만화의 맥락에서 "미쳐있다"라는 말은 그저 좋은 의미로만 해석될 수 없다. 왜냐면 이미 작중에서 "노예"라는 표현을 이미 깔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작중에 조사병단의 단장인 엘빈이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조사병단의 병장인 리바이가 엘빈을 살려낼 수 있는 묘약을 갖고 있다. 이때 리바이는 엘빈을 살리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리바이는 엘빈의 죽음을 마치 "구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엘빈을 다시 살리는 건 엘빈을 다시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엘빈이 유능한 리더인 건 분명 맞다. 그러나 그는 철저하게 목적지향적인 사람이었다. 목적의식이 매우 분명하고 뚜렷한 사람이었다. 더 나아가 그냥 목적에 미쳐있는 사람이었다. 목적의 노예였다. 이걸 더 확장시켜보면 엘빈은 이상(ideal)의 노예였다. 엘빈은 수많은 동료와 부하들의 희생 위에 서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엘빈은 도저히 동료와 부하들의 죽음들을 헛되이, 무의미하게 만들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 목적에 더욱 매달리게 했다. 엘빈이 죽기 직전까지 매달렸던 건 "지하실에 숨겨진 비밀"이었던 걸로 보인다. 엘빈은 그 지하실의 비밀을 탐구하기 위해 수많은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지하실이 엘빈에게 희망 그 자체였고, 그 희망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허용되어야만 했다. 리바이가 본 현실의 엘빈의 모습은 노예 그 자체였다. 그래서 엘빈의 가장 큰 절친이었던 리바이는 엘빈을 살릴 수가 없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노예도덕과 주인도덕을 구분한다.

노예도덕이란 특정 가치에만 얽매여있는 형태의 도덕을 의미한다. 니체가 기독교를 강력하게 비판한 것처럼, 신이라는 특정 가치에 나의 모든 것들을 예속시키며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 역시 노예도덕을 추구하는 사람이 된다. <진격의 거인>에서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도 정확히 이 지점인지도 모른다. "자유의 노예"라는 표현은 일면 모순적인 단어가 공존해있는 것 같지만, 자유를 특정의 고정불변한 가치로 두어 오로지 그것에 대해서만 매달리게 된다면 나는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주인도덕은 이와 다르다. 기존의 가치를 넘어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형태의 도덕을 의미한다. 이미 니체는 가치가 가변적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인간이 특정 가치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로 전락하기 전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여 노예에서 지속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이미 전제해두고 있다. 니체는 기존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지속적으로 창출할 수 있는 힘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상이 바로 그 유명한 초인(위버멘쉬)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존의 나로부터 계속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나는 현실에서 이상으로 나아가는 인간상이 윤리적 인간상일 수 있다고 말했다. 니체는 어쩌면 이러한 윤리적 주체(인간상)가 주인도덕의 영역까지 포섭해야 할 거라는 부분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진격의 거인>으로 돌아오자. <진격의 거인>에서 나오는 인간상들은 니체 기준으로 볼 때 모두 노예일 것이다. 작중에서 사실 주인도덕을 가진 자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현실적으로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가 되는 게 쉽지 않은 것도 분명 있겠지만, 진격의 거인의 세계관이 지나치게 참혹하고 비참한 것도 이에 한몫한다.

어쩌면 현실이 너무 비참하기에 내 신체만이 가진 독특성과 역동성을 내려놓고, 무언가 정신적인 것에만 매달리면 이 현실을 외면할 수 있다고 생각한지도 모른다. 마치 재난영화에서 건물이 무너지는 와중에 기독교인들이 도망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옹기종기 모여서 기도하는 것도 같은 모습일 것이다. 천국을 갈 수 있다고 믿으면 현실의 내 신체가 죽더라도 괜찮을 테니 말이다.

이 지점에서 <진격의 거인>에서 배울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우리 상황이 <진격의 거인>에서 등장하는 에르디아만큼 비참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굳이 비참한 현실을 잊기 위해 이상만을 바라볼 필요가 있을까? 답은 No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주의자들은 모두 비판받아야 하고 현실주의자가 답인가? 이 표현 역시 니체의 주인도덕을 감안하면 적절하지 못하다.

진정한 이상주의자이자 윤리적 인간상은 이상(Ideal)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인 건 분명하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상이 고정불변하지 않는 걸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상은 매순간, 매상황마다 변할 수 있다. 이 말은 이상은 늘 현실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현실에 내가 주어진 상황이 매순간 변하기에, 이상(ideal) 역시 매순간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매순간, 매상황마다 나는 이상을 새롭게 설정할 수 있다. 니체 이후의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건, "이상=자기 진정성(본래성)에 따르는 또 다른 가능성"을 말하는 형태일 뿐이다.

<진격의 거인>이라는 작중 상황이 노예 상태의 인간을 부각하고 극단화할 수밖에 없었다면, <진격의 거인>이 아닌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좀 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로운 형태의 삶을 살 수 있진 않을까? 우리가 니체라거나 실존철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이 부분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행운 메시지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