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주술회전> 회옥·옥절편으로 알아보는 "신체"와 "해석"의 문제
작성자 모엘
모엘의 단상
1편: <주술회전> 회옥·옥절편으로 알아보는 "신체"와 "해석"의 문제
모엘입니다. 장문의 글로 이제 종종 철학 관련 에세이를 연재할까 합니다. 그동안은 장문은 사람들이 안 읽기에 SNS용으로 토막글 위주로만 썼었습니다. 그런데 인문·철학 관련 공부를 계속 이어나가서 어느 정도 영글기도 했고, 글 스타일을 변경해야겠다는 생각을 마음만 하다가 이제 실행에 옮기려 합니다. 잡설은 거두절미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주술회전>에도 여러 주옥 같은 대사가 종종 등장하는데 일단 떠오르는 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가 고죠 사토루가 제자인 후시구로 메구미에게 개인의 기량을 보여주지 않고 서포트만을 하려고 하자, 각성을 촉구하며 "죽을 땐 혼자야"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오늘 이야기할 주제가 아니기에 언젠가로 미뤄두자.
두 번째는 오늘 이야기할 주제이다. 고죠 사토루는 세계관의 최강자가 되었지만 동시에 친구(게토 스구루)를 지키지는 못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대사를 친다.
고죠 사토루는 작중 최강자이다. 신체라거나 주술(기술)적인 역량에서는 그를 따라올 사람은 작중에서 등장하지 않고, 어쩌면 물질적인 부분에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고죠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그를 그리 선한 인물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그의 전반적인 지향점은 비주술사들(주술을 사용하지 못하는)을 주령들로부터 구하는 것이다. 고죠는 분명 작중 최강자이기 때문에 그 힘으로 세계를 뒤엎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술회전> 내내 세계를 구할 영웅 역할을 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일종의 소년 만화의 전통적인 클리셰라면 선한 주인공은 악역들을 용서하고 포섭하고 친구로 만들며 새로운 세계로 함께 나아간다. 그러나 적어도 <주술회전> 회옥·옥절편에서는 본인보다 정의롭고 선함을 추구해오던 친구(게토 스구루)가 악의 길로 빠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고죠 본인이 자신의 능력 개발에 몰두하느라, 친구에 대해 무관심했던 영향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최강자 고죠가 이야기한 "내가 구할 수 있는 건, 타인에게 구원 받을 준비가 된 녀석뿐이에요."라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
이제 게토의 서사를 보면 납득이 간다. 게토는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했고, 비주술사들(일반인)의 위선적이고 비열한 모습들을 지켜봐야만 했으며, 이들을 위해 싸우고 있는 주술사들의 무의미한 죽음을 목격해야만 했고, 게토 특유의 주술인 주령조술은 주령을 계속 입으로 삼켜야내야만 하는 역겨운 일이 수반되고, 절친한 친구인 고죠는 최강자의 자리에 올랐지만 자기 자신은 별다른 특별한 게 없어 위축된 상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상황에 덧붙여 츠쿠모 유키가 불을 지폈다. 츠쿠모 유키는 게토가 그렇게 변할지 모르고 이야기했던 부분이겠지만, 츠쿠모 유키의 말을 게토는 자신의 생각으로 덧입히고 해석하여 원숭이 같은 비주술사들을 모두 멸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의미"를 중요시하게 여기던 게토는 이 과정 속에서 "의미"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여 주술계를 뛰쳐나온다.
여기에 강하게 전제되어 있는 건 "신체의 해석"의 문제이다. 고대, 중세, 근대에서는 다소 멸시 받았던 "신체"라는 부분은 현대에서 다시 격상된다. "신체"라는 건 어쩌면 나만의 과거의 기억들이 강하게 결합되어 있는 그 무언가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신체"라는 건 개개인의 내러티브가 이미 반영된 하나의 산물이다. 게토의 내러티브를 살펴볼 때 그는 충분히 악(惡)에 기울기 쉬운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죽어가는 마당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무력한 상황 속에, 그는 어떠한 의미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츠쿠모 유키가 게토에게 하나의 가설을 제시하고 게토는 여기서 그 가설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 해석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내고 만다. 이 해석은 오직 게토의 신체(기억의 담지자 및 매개체)에서만 가능한 영역이다. 이 말은 고죠가 이때 츠쿠모 유키의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게토처럼 비주술사를 모두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다.
현대철학에서 강조하는 신체는 어쩌면 정신이라거나 의지만으로는 나를 이끌기에는 다소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동시에 개인의 내러티브가 가질 수 있는 힘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세계관 최강인 고죠는 개인의 서사에다가 새로운 해석을 더해 새롭게 의미를 구성한 게토를 "설득"하는 건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고죠의 "내가 구할 수 있는 건 구원 받을 준비가 된 녀석뿐이다."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구원 받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은 새로운 해석을 할 준비가 되었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러나 게토는 모든 비주술사들을 죽이겠다고 마음 먹으면서 해석을 이미 굳힌 상황이다. 그리고 게토는 이를 의지로 밀고 갈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새로운 의미가 되었고 신체를 구성하는 새로운 내러티브가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이 점에서 게토는 아직은 적어도 구원 받을 준비가 된 사람이 아니다(차라리 츠쿠모의 말이 그를 구원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더해 전혀 다른 맥락을 수용하여 새로운 해석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에 설득이 일어날 리가 없다.
우리는 민주주의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각각의 기억과 내러티브가 구성된 채로 "신체"를 갖고 있다. 우리는 나름대로 신체가 전제된 채, 상황을 새롭게 해석해가면서 나를 구성해가고 만들어나간다. "의식"이라는 것도 이 신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평등을 전제한 민주주의에서 천재적인 누군가가 등장하여 훌륭한 주장을 가져와 논증을 하더라도, 새로운 해석을 할 준비가 되지 않은 신체를 가졌다면 설득은 일어나기 힘들 것이다. 그저 과거의 관성과 반복에 젖은 신체는 새로운 걸 받아들여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해석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평등을 전제한 민주주의에서 특정 목적과 의도가 개입된 "설득"은 다소 일어나기 힘들다. 그리고 신체가 강하게 개입되어 단순히 의지만으로 변화를 이룩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소통"에 조금 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 "소통"에는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계몽시키려는 의도가 없다. 그저 동등한 관점에서 가치를 공유하고 교류하면서 서로가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는 것, 더 나아가 그 안에서 자신을 구성하던 내러티브와 해석이 바뀔 수 있는 지점을 찾는 것이 우리에게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만약에 고죠와 게토가 꾸준하게 계속 깊은 이야기까지 소통을 했다면 게토가 악의 길로 빠졌을까? 고죠와 게토는 분명 소통을 하지 않았다. 서로 간에 의미와 가치를 교류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혼자만의 깊은 생각과 상념에 빠져있던 게토는 이미 떠났고, 이런 걸 전혀 모르던 고죠는 뒤늦게 게토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설득이 일어날 수 없었던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 "운은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라는 말도 이와 비슷하다. 내가 새로운 해석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쪽 방향으로 충분히 나의 신체가 열려있다면, 이를 기회로 이용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