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란 무엇인가?> 강연록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강연록

작성자 모엘

언의 통찰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강연록

모엘
모엘
@dorimo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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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모엘입니다. 오랜만이네요.

제가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을 2024. 12. 21 (토)에 제가 운영하고 있는 모임(N의 언어)에서 진행했었는데요. 강연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인문·철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을 위해 강연록을 따로 작성해보았어요. 제가 이 강연록을 직접 강연한다고 생각하고 아주 구어체적으로 쉽게 풀어 써보려고 했으니 저장해두고 시간되실 때 두고두고 읽어보세요.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을 올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준 뉴닉 팀원분들께 늘 감사함을 전합니다.


안녕하세요. <N의 언어>를 운영하고 있는 언(모엘)입니다. 제 생각을 표현하는 조그마한 강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으러 와주심에 먼저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번에 제가 할 강연은 첫 번째 강연 <자아실현과 윤리>에 이은, 두 번째 강연 <인문학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철학과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제가 배운 것들과 생각한 것들을 새롭게 구성하여 제 오리지널로 준비해보았습니다.

본격적인 강연 시작에 앞서 말씀 드릴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해당 강연은 저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이 들어가있습니다. 아울러 해당 강연은 특정 정치적 사상이라거나 이념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지난 강연인 <자아실현과 윤리>도 그런 느낌이 있지만 아무래도 이 강연은 그 전 강연보다 깊이가 있기에 이 부분 참고 부탁드려요.

둘째, 자연과학, 수학, 공학, 사회과학 등을 깊게 공부한 사람들은 제가 이야기하는 것에 공감이 좀 힘들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상처를 받거나 반감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냥 "저 사람의 생각이구나~" 정도로 이해를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냥 이런 시각도 있구나~"로 생각하시면 비교적 편하게 넘길 수 있지 않나 싶네요..ㅎㅎ 제가 상당히 예민한 부분을 건드릴 수도 있습니다.

셋째, 해당 강연에는 엄청난 학자들의 논의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 강연을 약 1시간 반 정도 안에 끝내는 게 사실 말이 안 되죠😥 다만 제가 핵심만 뽑아보려고 했어요. 사상가 이름도 최대한 안 써보려고 했습니다. 분량에 대해서도 어디까지 이야기해야하나 고민을 했지만 적정선에서 끊도록 하겠습니다.

넷째, 제가 글씨를 잘 못 씁니다. 제가 ppt로 준비를 할 수도 있는데 굳이 준비를 하지 않은 건 칠판에다가 판서하는 것이 전달력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도 양해 부탁드려요. (강연록에서는 간간이 판서 화면을 캡쳐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자, 시작해보겠습니다.




- 1부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차이

여러분은 인문학이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네. 맞아요. 흔히 문사철이라고 우리가 떠올리기도 하죠. 문학, 사학(역사), 철학을 묶어서 문사철이라고 부르는 것 같아요. 취업이 안 되는 학과라고도 말하기도 하죠. (웃음)

다만 저는 인문에 종교와 예술의 영역이 들어간다고 생각해요. 문사철을 인문학이라고 정의를 해버리면 놓치는 부분들이 생길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처음부터 문사철로 접근하지 말고 다르게 접근을 시도해볼게요.

먼저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과 인문학에 대한 차이를 둬보려고 해요.

과학 (Science/학문)

Fact(사실) / 눈에 보임 / 필연적, 법칙적, 보편타당적, 객관적, 실증적, 관찰 및 관측 가능

인문학(Humanities)

Fiction(허구) / 눈에 보이지 않음 / (상호)주관적, 개연적, 가능성, 변화, 자유 (드러나기 이전)

과학은 우리가 Science라고 하죠. 사실 Science는 유럽권에서는 학문이라고도 쓰이는 것 같아요. 그 중에서 흔히 과학, 자연과학이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사실(Fact)를 주로 다룹니다. Fact는 보통 과거의 사실을 지칭하죠. 그 사실들의 인과관계 속에서 어떠한 필연성을 발견하여 이를 법칙화시키는 것이 과학에서 주로 시도하는 것이죠. 이런 법칙은 귀납적 접근을 통해 일반화를 통해 도출이 되고요. 그리고 그 법칙은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게 보편타당성을 띠어야 하는 거죠. 그저 모두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에 객관적이기도 하고 오직 관찰과 관측에 집중하기에 실증적 성격을 띱니다. 우리가 지금 학문(Science)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과학적 방법론이 많이 쓰이고 있다고 봐야 하겠죠. 그리고 인간을 자극-반응하는 객체로서 인식하는 성격도 강합니다.

인문학은 우리가 Humanities라고 부릅니다. 저는 과학의 사실(Fact)과 대비적으로 인문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허구(Fiction)에 좀 더 주목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드러나기 이전 단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뒤에서 조금 더 설명하겠지만 인간 정신 안에 내포된 무언가라고 볼 수 있겠죠. 인간의 정신 안에 있기에 이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성격을 띱니다. 그것이 사람들을 통해 동의를 얻게 된다면 상호주관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요. 인문학은 또한 자연과학의 필연성과 법칙성과는 다르게 개연성가능성이라는 측면에 더욱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라거나 자유에 집중하죠. 또한 인간을 판단-행위하는 주체로서 주목을 합니다.

개념을 막 난사했기 때문에 어려울 수도 있어요. 뒤에 제가 엉킨 실타래를 조금씩 풀어보려고 할게요.

일단 여기까지 접근했을 때 인문학이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학문과는 거리가 먼 건 우리가 알겠어요. 그러면 "인문학이 Fiction을 다룬다면, 즉 허구를 다룬다면 그것이 곧 가짜라는 거냐?"라는 의문을 제시할 수 있겠죠. 그러면 상대적으로 인문학은 과학보다 가치가 확연히 떨어져버리죠. 우리가 진리라고 하는 것들을 사실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면요.


인문학에서 주목하는 건 사실 그 자체보다는, "인간이 Fiction을 만든다는 것"에 조금 더 방점을 찍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Fiction이 뭔데?"라는 대답에 저는 다음과 같이 말씀 드리고 싶어요.

의미(meaning), 가치(value)

목적(purpose), 기대(expectation), 꿈(dream), 이야기(narrative), 감정, 이상, 관념..etc

제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어쩌면 위의 이러한 애매한 용어들이 전부 Fiction이 되는 거죠.

대표적인 Fiction으로는 목적이 있습니다. 목적 그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죠. 그러나 우리는 목적을 세우고 의지를 바탕으로 그 목적을 향하여 좇아갑니다. 이때 목표라고 함은 그저 목적을 눈에 보이도록 가시화하고 구체화한 정도인 거죠. 

인간의 꿈, 기대치, 목적, 이상.. ---------------> 이념(Idea), 사상(Thought)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꿈, 기대치, 목적, 이상 등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이를 좇아가죠. 이런 것들에 어떠한 합리적인 방향성이 제시되고 엄밀한 논증 구조가 붙으면 그것이 이념과 사상이 되는 것이죠. 이런 모든 것들이 인간에게 있어서는 의미있고 가치가 있는 것일 테고 이는 곧 소중함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이 소중함을 다루는 모든 것이 인문학이 되는 거죠.

그리고 이 모든 것(꿈, 이상, 이념.. etc)들의 집합체를 저는 철학적 개념으로서 "신(God)"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를 믿고 따르고 실천하고 행위해나가는 것은 종교와 관련이 있죠.

그리고 이런 인간의 이상과 이념을 "표현"해내는 것이 예술에 해당하겠죠.

이 두 가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에 조금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꿈, 목적, 이상 등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 정신 안에 있기에 주관적이죠. 그리고 이러한 Fiction을 다룬다는 것은 곧 "사유"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유는 분명 나의 "사유"겠죠. 여전히 주관성에 머물러있죠.

이 주관적인 것들을 밖으로 꺼내 대화하고 이해하는 건 곧, 이러한 픽션들이 드러나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죠. 그리고 이것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동의를 얻게 된다면 그것을 현대 철학의 용어로 상호주관적이 되는 거죠.

 

 아무튼..! 여기서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를 해보자면요.

첫 번째는 인간이 경험적 사실로부터 의미부여를 하고 새롭게 판단을 한다는 거고요. 두 번째는 인간은 새롭게 부여한 의미로부터 새롭게 실천을 통해 경험을 만들어간다는 내용이죠. 세 번째는 예를 들어 사회현상에 대해 드러나지 않는 근본 원인들에 대해 사유하고 분석하는 것일 수 있죠.

이런 것들이 인문학에서 주목하는 모든 것이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 3번째가 철학적 성격을 좀 띠는데요. 저희 은사님께서 인문성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셨어요.

인문성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풍성한 해석과 논의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라고요. 이때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어떻게 보일까요? 말과 글을 통해서 보이게 되겠죠. 이 무수한 해석과 논의가 세계가 확장될 수 있는 지점을 만든다고 저는 보고 있는데요. 뒤에서 더 이야기를 해볼게요.

정리를 하자면 과학은 인간이 의미부여를 하는 영역을 배제하고 가치판단하는 부분을 제외하고, 오직 사실 그 자체만을 보려고 하는 면이 있죠. Fiction 이 부분은 주관적이고 왜곡이 될 수 있는 영역이기에 별로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고 곧바로 드러나는 영역만 주목을 하죠.

그러나 인문학은 Fact와 Fiction이 두 가지 부분이 오가는 영역에 더 주목을 한다고 볼 수 있는 거예요. (Fact -> Fiction -> Fact -> Fiction -> Fact -> Fiction ....)


그래서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거냐? 라고 물을 수 있겠죠.

과학은 과거의 사실, 현실을 주로 다루죠. 과거의 사실들의 인과성을 분석해보니 우리가 쭉 불행하고 파멸의 길을 가고 있어요. 그러면 미래도 곧바로 불행할 것으로 예측하기 쉽습니다.

인문학은 이와 다르죠. 제가 앞서 언급했듯이 미래적 변화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둡니다. 어떤 한 개인이 망나니와 같은 삶을 살았다면 반성을 통해서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죠. 이를 인문학에서 "자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과거로부터의 자유, 감각적 유혹으로부터의 자유겠죠.

인문학이 자연과학으로부터 던지고 싶은 물음은 이거겠죠. “근데 과학이 개개인의 이러한 변화를 예측할 수 있어?”라는 거죠.

인문학이 지적하는 것 중 하나가 “믿음”의 문제인 거죠. 우리가 지금까지 불행했고 나라가 망해간다면 그것에 대한 이유(Fiction)은 우리 모두가 이기적이게 살 거라는 믿음 때문이 아니냐?라고요.

가정이지만 만약 우리 모두가 정신적 각성을 동시에 일으켜 미래의 기대치를 향해 희망을 끌어들여 더 큰 좋음(善)을 향해 서로를 믿고 나아간다면 미래는 분명 달라지지 않겠냐?라는 물음인 거죠. 인간이 만들어내는 가치는 분명 사실과 경험인 Fact로부터 도출되지만 그것은 곧 어떠한 새로운 미래를 가리킬 테니까요. 망나니처럼 살던 사람이 반성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요.

따라서 "분수에 맞게 살아라!", "네 주제를 알아라!"라고 말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상한선을 그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거죠. 인간의 전혀 다른 걸 할 수 있는 미래적인 변화 가능성을 무시해 버리는 것과 비슷한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런 논리가 대충 보수 진영의 논리가 될 수 있는 거죠. (웃음)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차이

아까 제가 과학이 인간, 개개인의 이러한 변화들을 예측하지 못한다고 했어요. 근데 실제로 지금 사회에서는 꽤나 빅데이터, 통계 등이 핫한 이슈이기도 하죠. 그리고 우리는 빅데이터를 통해서 실제로 미래를 내다보려는 시도도 하고 있고요. 그리고 그런 시도를 저는 사회과학에서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사회과학에서 가장 간판 학문은 사회학이죠. 그렇다면 사회학이 인문학이냐는 물음을 다시 던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고요.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차이를 저희가 한 번 살펴본다면 인문학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사회학은 기본적으로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학문입니다. 사회현상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방법은 2가지가 있죠. 고등학교 때 사회 교과목을 사회문화로 선택했다면 아주 익숙하실 거예요.

양적 연구 방법(실증적 연구 방법) - 방법론적 일원론 (과학적 연구 방법 활용)

질적 연구 방법(해석적 연구 방법) - 방법론적 이원론 (인문학적 연구 방법 활용)

위의 두 가지죠. 양적 연구부터 좀 살펴볼까요? 양적 연구 방법에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실험법과 설문조사법이죠.

실험법은 아무래도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하겠죠. 어떠한 인위적인 통제요인을 두어서 독립변수와 종속변수 간의 관계를 도출합니다. 그 안에서 법칙성을 발견하죠. 과학과 비슷해보이죠?

설문조사법은 우리에게 익숙하듯이 매우 좋다 / 좋다 / 보통이다 / 아니다 / 매우 아니다 등 보통 5중 척도로 객관식 문항들을 구성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런 수치들을 취합하면 통계가 되겠죠. 다만 여기서 인문학적 관점을 우리가 강하게 끌고 온다면 이 부분이 굉장히 이상합니다.

물론 모든 통계를 인문학에서 비판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출생률과 같이 순수하게 Fact만을 가지고 한 통계는 문제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필요하니까요. 다만 설문조사나 객관식 같은 부분은 인문학도들한테서 굉장히 "띠용~"적인 요소가 있다는 거죠.

왜일까요? 뭐가 문제일까요? 여기서 사회학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을 하나 짚고 넘어가죠. "개념의 조작적 정의"를요.


우리가 앞서 이야기했던 과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수학"적 모델을 사용합니다. 자연법칙이라고 말하는 것들도 모두 수학으로 되어 있죠. 숫자로 계산해서 결괏값들을 도출하는 방식이죠. 여기서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눈치를 채셨다시피 이는 성과주의, 결과주의, 능력주의적인 요소와 관련이 있습니다. "돈", "성적", "SNS 팔로워수" 등이 그렇죠. 우리는 어떠한 활동을 통해 이러한 객관적인 수치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 객관적인 수치라는 게 마치 세상의 정답과도 같아서 그게 나의 가치의 전부인 것마냥 박탈감과 우울감을 느끼기도 하죠. 그런 수치들에 의해서 비교를 통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것이 아니라 그냥 나는 내 갈 길을 가면 될 텐데 이런 숫자들이 비교를 만드는 요소가 있는 거죠.

즉, 크게 보면 인문학적 관점에서는 이러한 모든 부분들이 자연과학적인 잣대를 인간에게 들이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거죠. 양적 연구 방법의 양(Quantity)이라는 것은 결국 숫자를 뜻합니다. 숫자는 모두에게 객관적으로 인식되죠. 그리고 이를 그래프로 만들어버린다면 비교가 굉장히 용이하고 매우 효율적입니다. 그저 결괏값만 크면 되죠. 사회과학의 다른 학문들인 경제학, 경영학, 정치학 등이 다 이런 영역인 거죠. 정치학도 상대편과 이해관계를 통해 자신의 이윤을 최대화하고 손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을 취한다면요. 경제학에서 말하는 인간이 합리적인 동물, 경제적인 동물이라는 건 타인에게 베푸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관계, 이해관계를 확충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거고요.

다시 사회학의 개념의 조작적 정의로 돌아와보죠. 개념의 조작적 정의라고 함은 결국, 인간의 질적이고 다양한 가치들을, 다양하고 다원적인 인간을 어떤 일률적인 기준에 의해서 수량"", 수치"", 계량""를 시도하는 겁니다. 숫자로 치환시키는 거죠. 어떠한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기준에 의해서 말이죠. 객관식의 설문 조사가 이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죠.

다만 인문학적 관점에서 질문을 할 수 있죠. 내 삶의 의미와 가치, 내가 생생하게 느끼는 이 감정과 느낌을 감히 수치화하여 타인의 것들과 비교할 수 있는가?

이 자체가 인문학적 감수성으로 보았을 때 말이 안 되는 거죠. 정통 철학과 인문학 관점에서는 이 부분을 강력하게 규탄합니다. 우리가 문학, 특히 시에서 말하는 비유와 은유를 생각해보면 쉬울지도 몰라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비유와 은유라고 본다면요. 개념의 조작적 정의라고 함은 이 부분을 객관화시켜서 주관적인 것들을 배제하려고 보는 거죠.

제가 이러한 상황을 비유로 들자면, 밤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별들을 잠자리채로 낚으려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마음 속에 둥둥 떠다니는 부유물들을 숫자로 강제 치환하는 거죠.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나요?"라는 표현도 있죠. 이 말은 좋아하는 데 이유가 없다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저 언어로 표현하더라도 언어 그 자체로 충분치 않을 것이라는 말이죠. 근데 이를 인공어라거나 숫자로 대체하려고 하니까 문제라고 보는 거죠. 그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잔여물이 생기고 인간의 아주 독특한 부분들이 소외된다고 보는 관점인 거죠.


즉, 설문조사의 통계적인 방식은 나의 주관적인 부분을 강제로 수치화해 버립니다. 설문조사법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겠죠.

첫 번째로 객관식 선택지를 고르는 순간 나의 현 상태를 '그것'으로 규정해버립니다. 우리는 현재의 나를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죠. 무의식의 영역은 늘 우리를 따라다니죠. 어쩌면 자가 검진의 오류가 늘 둘러싸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죠.

두 번째로는 첫 번째와 같은 맥락으로, 설문조사 그리고 빅데이터가 미래를 예측하는 거라고 한다면 여기서 바로 문제가 생기죠. 인간은 나조차도 미래에 내가 어떻게 될지 예상하지 못합니다. 아까 예시 중에 망나니가 반성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살 거라는 것을 그 이전의 망나니가 예상을 했을까요? 전혀 못했겠죠. 예상을 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안 살았겠죠. (웃음) 근데 통계가 시도하는 것이 과거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려고 한다고 본다면 개별적 인간에게 있어서는 늘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거죠.

세 번째로 설문 문항에 내가 찍고 싶은 게 안 들어가는 케이스도 있죠. 우리가 심리 검사를 하다가 2지선다형에서 자주 느끼는 거 아닙니까? 내가 고르고 싶은 게 없는데 우리는 둘 중 하나를 골라야만 하고 고르는 순간 그 선택지에 의해 규정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이런 선택지가 주어져서 시작하는 통계보다는 오히려 글을 쓰게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정신을, 사유를 더 잘 드러낸다고 보는 거죠.)

특히 사회학, 양적 연구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우리를 비슷한 유형의 군집으로 묶으려는 시도를 하는 거겠죠. 나라는 독특하고 자유로운 개인을 특정 집단에 귀속시키려고 하는 거죠. 나는 그러기도 싫은데 사회학자의 관점에서 어떤 유형으로 묶여버립니다. 그리고 거기서 어떠한 법칙성을 끌어내려는 방식이죠. 그래서 인문학적 관점에서는 매우 이질적인 느낌을 받는다는 거죠.

실제로 개개인을 집단으로 묶어버리면 오차도 적고 변수도 적긴 합니다. 개인을 예측하기는 어려워도 집단은 예측하기가 좀 수월한 편이죠.

근데 정통 철학, 인문학적 관점에서 계속 주목하는 건 개개인의 주체성과 자유의 영역입니다. 끊임없이 변화를 할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거죠.

설령 이런 집단에 귀속하는 것이 객관적일 수는 있지만 그 객관에 "진정한 나 자신"은 빠져 있다고 보는 겁니다.

물론 이러한 통계 자체를 아예 없애야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경제학과 더불어 경제발전의 척도가 통계니까요. 다만 우리가 정말 문제라고 한다면 통계를 활용할 때 문제가 될 수 있는 것 같네요. 나의 정신적인 다양한 부분들을 간과하고 숫자로 스스로를 규정하려고 할 때 가장 큰 문제가 되겠죠. 통계는 그저 도구와 수단으로써 사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자, 엄청 빌드업을 해왔죠?😥 왜 이렇게 빌드업을 했냐면 질적 연구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서 했습니다. 질적 연구는 양적 연구에서 취한 자연과학적 방법론과 다르게, 인문학적 연구 방법을 취하고 있어요. 현대 철학에서의 현상학과 해석학 영역을 가져온 거죠.

양적 연구에서 하는 양화와는 다르게, 질적 연구는 질을 양화하는 것이 아니라 질(Quality)을 그 자체로 보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질적 연구 방법에는 면접법과 참여관찰법이 해당됩니다.

면접법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이고 참여관찰법은 직접 집단에 뛰어들어가서 참여해보면서 그 집단의 구성원들을 지켜보고 나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눈치가 빠른 분들은 아시겠지만.. 네. 주관적입니다. 그리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죠. 연구자의 가치가 개입이 됩니다. 그러나 심층적인 이해가 가능하죠. 그러나 인문학의 대전제는 늘 가치의 개입을 깔고 갈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겁니다. 그게 다시 앞에서 이야기한 Fiction인 거죠.

 


그래서 결국 질적 연구 방법은 인문학적 연구 방법이 쓰인다는 거죠. 그렇다면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사회학에서 질적 연구는 인문학이랑 아예 동격인 거냐?

여기서 한 가지만 짚을게요. 인문학에선 늘 인간이 "판단"하고 "행위"로 나아가는 과정에 포커싱을 한다는 거예요. 조금 더 역동적인 모습을 보려고 하는 거죠. 이때 행위라는 건 늘 미래지향적인 것을 의미할 테고요.

사회학에서 하는 것이 그저 관조를 통해 어떠한 정적인 현상 관측에만 머무른다고 본다면 우리는 사회학을 인문학 그 자체라고 말하기는 다소 어려울 수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제가 양적 연구와 질적 연구를 나누긴 했지만 현대 사회학에서는 여전히 양적 연구가 주류인 것 같아요. 모든 학문에 과학적 연구 방법이 쓰이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제 개인적으로 인문학을 다른 과학들과 이름을 맞추기 위해 인문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개인적으로 싫어하는데요. 인문학까지 과학적 연구 방법을 쓰려고 하는 시도를 막고 싶은 그런 마음이기도 합니다.

 

정리를 하자면 과학(학문)이라고 부르는 건 객관적, 실증적, 사실적인 부분에 많이 주목한다. 그리고 인문학은 다소 (상호)주관적, 허구적, 관념적, 다소 사변적인 면도 있다는 것이죠. 사변적이라는 말은 철학에 대한 부정적인 어조로도 많이 쓰이는데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사변적인 것도 결국 현실의 행위로 이어지게 된다면 그저 사변적이지만은 않겠죠.

잠시 쉬는 시간 좀 가집시다. ☺️




- 2부

문사철과 인문학

자,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것들과 맨 처음에 이야기했던 문사철과 이어서 다시 생각을 해봅시다. 저는 인문학을 과학과 견주어 Fiction에 주목한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 점에서 볼 때 문학은 분명 Fiction, 즉 허구를 다루죠. 철학도 보편적인 것들에 대해서 논하려고 하고 있지만 그것도 개인의 주관에서 출발하고, 결국 이념과 사상을 말하니 Fiction입니다.

그렇다면 역사는 뭔데? 역사는 객관적이고 실증적이지 않냐? 역사는 과학적 방법론을 써야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는가? 모엘! 네가 말하는 기준이라면 역사는 인문학이 아닌데?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

이 부분은 지금도 굉장히 논쟁적인 지점이죠. 그러나 저는 역사는 이야기(narrative)라는 관점을 다시 차용해오고 싶어요.

우리가 인문학을 문사철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제가 생각하는 역사와 문학은 만나야 한다는 거죠.

역사가가 실증적인 사료들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사람이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위 그림처럼 우리가 가정을 한 번 해봅시다. 역사가가 과거를 돌아보면서 2020년에는 역사적 사료를 발견했어요. 2021년에도 사료를 발견했지요. 그러나 2020년과 2021년 사이에는 어떠한 사료도 발견되지 못하는 상황(BLANK)이라고 봐봅시다.

이때 역사가가 해야 하는 작업은 2020년의 사료와 2021년의 사료를 가장 그럴 듯하게 이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보는 거죠. 그 이야기를 더 잘, 그리고 더 많이 설명하는 것이 역사(History)가 되는 거죠. 여기에 사실 관계의 필연성은 없죠. 오로지 "개연성"만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개연성이 다시 역사가 되겠죠.

그럴 듯하고 개연적인 이야기들끼리 논박을 하고 그것 자체가 학문이 되고 더 그럴 듯하고 더 설명이 잘 되는 이야기들이 하나의 역사가 되는 거죠.

네 맞습니다. 역사가의 "Fiction"이 들어가는 것을 이미 전제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역사가 문학과 만난다는 건 Fact에 Fiction이 들어가는 방식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문학이 역사와 만난다는 것은 뭘까요?

저는 좋은 문학은 늘 현실 속 우리의 삶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Fact에 기반을 해야 한다는 거죠. 제가 이전에 인문학은 인간이 판단을 하고 행위로 나아가는 역동적인 부분에 대해 주목한다고 이야기를 했었죠? 문학이 아예 현실과 동떨어진 천공의 판타지를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내용이 현실의 우리랑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요. 이러한 문학이 인문적이고 훌륭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의 공감대를 충분히 자극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의 현실의 Fact를 충분히 반영하되 전혀 다른 이야기를 끌고 나가야 한다는 거죠. 여기서 다시 Fiction이 개입이 되는 겁니다. 익숙한 영역에서 낯선 영역으로 오로지 개연성을 통해 이동시키는 거죠.

역사: Fact <------------ Fiction (사실들에 픽션이 개입)

문학: Fact ------------> Fiction (사실을 바탕으로 한 픽션)

익숙함에서 낯섦으로 이동하는 것은 우리의 감정을 건드릴 것입니다. 문학, 예술만이 갖고 있는 아주 독특한 역할이죠. 그리고 이 개연성을 통해 문학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현실에서 변화 가능성을 꿈꾸고 실천해나가는 거죠. 새로운 판단에서 새로운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겠고요. 다시 저는 이것을 "자유"라고 말할 것입니다. 문학작품을 읽기 전과 읽은 후가 달라졌다라는 것을 전제한다면요.

즉, 저는 역사든 문학이든 "이야기(narrative)"라는 관점을 취하고 있어요. Fact와 Fiction은 늘 결합되어야 하고요. 그렇게 보면 역사도 인문학에 들어갈 수 있겠고요. 한강 작가가 이 영역을 정말 잘 해냈다고 생각을 합니다.


문사철 중 마지막으로 철학을 살펴봅시다. 철학에는 많은 분과가 있어요. 형이상학, 인식론, 논리학, 언어철학, 과학철학, 수학철학, 예술철학, 역사철학, 존재론, 윤리학, 미학, 현상학, 해석학 등이 그 예시겠죠. 물론 이런 분과를 여기서 다 다룰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우리가 일반적으로 철학이 인문학에 포함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인문학에 포함이 안 되는 영역이 현대에 와서는 생겼다라는 지점을 말하고 싶어요.

그 영역이 저는 현대철학 중 분석철학 계열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두 가지로 확연히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내용들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이분법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제가 그래도 각 학문들에 대해 느껴지는 인상들을 적어보았어요. 제가 한 때 분석철학 공부하는 친구한테 형은 왜렇게 애매한 걸 좋아하냐는 물음을 들어본 적이 있었죠🙄

저는 정통 철학 즉, 유럽철학이 인문학이라고 생각해요. 철학에서 가장 인문적 성격을 띠는 것이 실천철학이라고 보고 그 실천철학이 윤리학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윤리학은 정치철학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고요.

앞서 말했지만 철학의 인식론, 존재론 이런 것들도 모두 결국 우리의 행위, 실천, 삶을 위해, 곧, 윤리학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거죠. 그리고 현대에서 그 영역을 더 열어놓는 철학이 유럽철학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윤리학(철학-인문학)

그렇다면 제가 말하는 윤리학이 뭘까요? 언(모엘)이 말하는 인문적인 철학, 윤리학에 대해서 잠시 짚고 넘어가도록 하죠. 엄청나게 압축해서 이야기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저는 인간은 누구나 이 원을 두르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이 원이 뭘까요?

1차적으로 저는 이 원을 울타리로 비유를 들고 싶어요. 인간은 누구나 이 울타리를 갖고 있다는 거고요.

기존의 전통적인 도덕적 관점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은 동물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감각적인 유혹이라거나 쾌락, 충동에 휘둘리기도 합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대표적이죠. 누가 나에게 공격을 하게되면 나 역시 당연히 그에게 반격을 하는 것도 이에 해당되고요. 자극이 있으면 그냥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이 있죠. 이를 저는 울타리로 비유하고 싶어요. 그리고 지금의 과학적 관점에서는 이 울타리의 영역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기존의 전통적인 도덕적 관점에서 이것은 철저하게 악(惡)이었습니다. 내가 나의 욕구를 못 이겨 타인에게 해를 끼친다면 이는 인간답지 못하고 악하다고 볼 수 있는 거죠. 우리가 이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성악설로 이야기를 할 수 있기도 하지만요.

기존의 종교, 도덕 등에서 말하고 싶었던 건 인간은 이러한 경향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본 거죠. 그리고 이것을 우리가 선(善)이라고 여길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나의 울타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죠. 독일 근대 철학자인 칸트는 여기서 선의지라는 개념을 사용했고요. 능동성과 주체성도 이와 연결되어 있겠죠. 이렇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한다면 인격, 인간의 존엄성 이라는 개념도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있을 거고요.

방금의 도식을 살짝 구체화하면서 동시에 틀어보겠습니다.

현대의 윤리적 관점 (1)

울타리를 이해관계의 영역, 편견과 선입견의 영역으로 두어보죠. 인간은 누구나 이해관계 안에 있고 기존의 관습과 관행적 형태 안에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특정 목적을 위해 수단을 활용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일상성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 도식과 다르게 일상성은 악(惡)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어쩌면 일상성의 영역은 하나의 질서이자 우리가 수호해야 할 하나의 공간일 것이지요. 처음에 이야기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도 결국은 자기 이해(Interests)에서 어떠한 유용성, 효율성, 생산성을 위한 훌륭한 도구가 되겠죠.

일상성의 영역은 익숙함과 편안함의 영역이기도 하죠. 기존의 도덕, 관습, 문화 등의 관행적인 영역은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익숙할 테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기존의 가치 기준에 의해서(선입견에 의해서) 어떤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고 규정합니다. 좋으면 취하고 나쁜 건 멀리하는 방식이죠. 경제학에서 합리적인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도 여전히 이 영역일 겁니다. 우리가 이를 악(惡)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뭔가 부족한 요소가 느껴지지 않으신가요?

당연히 인문학, 그리고 윤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윤리적인 인간상은 이를 넘어서야 합니다.

현대의 윤리적 관점 (2)

네. 여러분들께서도 짐작했다시피 윤리학에서는 다시 나의 이해관계, 선입견과 편견은 극복과 초월의 대상이라고 말하겠죠. 여기서의 울타리도 결국은 집어던질 수 있어야 하는 거죠.

선입견과 편견을 벗어던진다는 건 새로운 타자와의 만남과도 같습니다. 마치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 새롭게 모험을 하는 것이죠. 해석학에서 말하는 인식이란 나의 선입견과 편견을 깨는 거죠. 그렇게 나는 기존의 나로부터 벗어나서 타자와 만나고 타자와 함께하는 거죠. 그 안에서 전혀 다른 나의 모습을 찾아나서고 나의 세계를 확장해 가는 거죠. 당연히 인식의 폭과 사유의 폭은 확장될 것이고요. 그렇게 새로운 가치가 창출이 되는 거죠. 그것은 기존의 관점으로도 포섭할 수 없는 새로운 영역이라고 보는 것이겠고요.


조금 어려우신가요?

우리가 때론 어떤 상황이 들이닥쳐서 해보기도 전에 지레 겁먹을 때가 있잖아요. 나에게 해를 끼칠 것 같아서 두려움과 걱정으로 밤잠을 설칠 때가 있었죠. 그런데 우리가 결국 겪어보고 나니 "막상 해보니까 재밌네?", "별 거 아니었잖아!",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네?", "나 이거 잘했었네?" 등을 경험해본 적도 많았을 겁니다. 맞아요. 바로 이 영역입니다.

"이거 좀 해볼 만할 것 같은데?" 같은 영역을 자기 확신을 통해 모험하고 확장해 나가는 거죠. 그리고 그게 비일상적인 영역이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엔 필히 지성적 작업이 수반되죠. 일상적인 영역에서, 내 과거의 경험들 속에서, 내 안의 어떠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엔 지적인 부분이 들어가니까요. 그 지적 작업을 통해 나아가 기존의 선입견과 편견으로 규정하는 판단이 아니라 무언가 전혀 다른 새로운 판단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기존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행위를 할 수 있게 되겠죠. 이 지점이에요.

아주 러프하게 이야기했지만 이것이 윤리학의 모든 것이지 않나 싶네요😉

물론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울타리의 나의 모습을 마치 악(惡)으로 여겨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일상적인 영역은 늘 일상적인 영역을 "전제"할 때 나타납니다. 기존의 가치들을 내 안에서 꿈짝꿈짝하고 변주하고 비판하고 재해석하고 지성적인 의미를 더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거죠. 그 새로운 가치는 내가 창조한 가치인 거죠.

내가 비일상적인 영역으로 넘어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시 일상성이 되겠죠. 그리고 세상은 내가 만든 새로운 가치를 기존의 가치를 확장함으로써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비일상적인 영역으로 나아가야 하겠죠. 결국 자아실현이라는 것도 이 무한 반복인 거죠.


윤리학을 이렇게 접하시니까 어떠신가요?

우리가 흔히 도덕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관습이라거나 법적 관점, 도덕적 규범 하에서 하기 싫은데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그런 강제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죠.

다만 윤리학에서 말하고 싶은 건 그저 내가 갖고 있는 힘, 능력의 발휘를 말하고 싶은 거죠. 이때의 힘은 새로운 해석과 의미를 만들어내려는 힘이겠고요. 그렇기에 하기 싫은데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기에 하는 것에 가까운 거죠. 그리고 그게 계속 말하지만 "자유"인 거죠. 그 자유엔 변화와 가능성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고요.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 첫 번째 강연인 <자아실현과 윤리>에서 좀 적극적으로 다루긴 했었죠😁

네. 그러면 이 울타리(이해관계, 선입견과 편견 등)을 벗어나 새로운 판단을 하고 새로운 행위로 나아가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윤리학, 인문학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했습니다. 이제 예술과 종교 이야기를 해야 하겠지요?

나의 어떠한 감정적인 요소를 건드려서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예술입니다.

그리고 더 근원적이고 더 큰 무언가를 믿음으로써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종교입니다.



예술과 종교

처음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예술과 종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주로 다루겠죠. 예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감정, 이념)을 밖으로 드러나도록 표현하는 것이고 종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신)을 향해 믿고 실천하고 나아가는 것으로 생각한다면요. 제가 계속 강조하는 Fiction을 다루고 있는 거죠.

칸트가 생각했던 진선미(眞善美) 도식을 갖고 오면 사실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칸트가 직접 저술한 3대 비판서는 아마 우리가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도식을 조금 더 우리가 이해를 해본다면 인식의 영역은 우리가 말하는 사실의 영역인 거죠. 과거의 사실들을 바탕으로 진리치 참/거짓(T/F)을 판단하는 거죠.

실천(행위)의 영역은 우리의 가치판단과 관련이 있겠고요. 우리가 선하다고 옳다고 판단하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하니까요. 뭔가 도덕이라거나 종교와 관련이 있어 보이죠?

그리고 미적 판단의 영역 또한 우리의 가치판단일 것입니다. 아름답다라고 우리가 판단하는 거죠. 무언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라고도 저는 표현하고 싶어요. 구체적인 실천까지 나아가기 직전 단계기도 하죠. 당연 아름다움을 표방하는 예술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미(美)에서 진(眞)으로 갈수록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고 진(眞)에서 미(美)로 갈수록 주관적인 것처럼 보이죠. 처음에 과학과 인문학을 구분했을 때 과학을 Fact, 진(眞)에 중심을 둔다고 했던 것처럼 인문학은 Fiction인 선(善)과 미(美)에 좀 더 주목을 한다고 볼 수 있을 거고요.

여담으로 플라톤에 대한 주류 해석 중 하나가 플라톤이 진선미(眞善美)의 일치를 추구하려고 했었다는 거죠. 마치 선과 아름다움도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고 그게 이데아(Idea)라고 본 거죠. 플라톤 이야기는 여담이었고요.

칸트는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판단력비판>이 매개하고 있다고 보았어요. 그리고 이는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여러분은 미(美)와 선(善)이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인문학에서는 판단에서 행위로 나아가는 것을 주목한다고 했죠? 판단-행위-판단-행위-판단-행위가 우리네 삶이죠. 뒤에 더 이야기하겠지만 미(美)와 선(善)은 계속 교차하며 나아가야 한다는 거고요.

여하튼 결론적으로 인문에는 예술과 종교, 문화 영역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문화는 사람들과 특정 방식으로 관계를 하는 것을 말할 테고요. 예술과 종교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떠한 기능을 할까요?

 


먼저 예술입니다. 아까 문사철하면서 이야기했던 문학은 당연히 예술에 포함이 되겠죠. 예술은

첫 번째로, 자기 표현의 역할을 합니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이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삶이 우리는 예술적인 삶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도 이와 같은 거죠.

두 번째로, 예술은 나의 이상, 이념, 사상 등을 예술작품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역할을 합니다. 현실에서 나의 이상을 구현하고 실천해가는 것은 모두에게 어려운 일입니다. 예술가들은 실천에 앞장서는 활동가랑은 거리가 멀죠. 그러나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을 어떠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이해해 본다면 그 세계에는 예술가의 이상과 이념이 그대로 담아낼 수 있다는 거죠.

세 번째로, 저는 이정표라는 비유를 들고 싶은데요. 예술가는 예술작품을 통해 이정표를 세우는 역할을 하는 거죠. 예술가는 이정표를 세우고 우리는 그 이정표에 대해서 풍부한 해석과 논의를 합니다. 이정표를 통해 우리의 문화가 확장되고 세계가 창출되는 거죠. 그리고 감상자로서의 우리는 그 예술작품을 통해, 풍부한 해석과 논의를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게 된다면, 현실에서 새로운 행위가 가능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그리고 예술가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이정표를 쌓아올려갈 테고요. 그리고 이것의 무한 반복이죠. 이상적 민주주의는 이렇게 세계 밖으로 깃발들을 꽂으면서 세계가 확장해가는 거고요.

세계 바깥에 이정표를 세우고 그 이정표만큼 세계를 확장하고 그 바깥에 이정표를 또 세우고 세계를 다시 확장하고 …

이때 제가 이정표 밖으로 원을 크게 그리는 이유는 이 이정표를 마치 신격화하여 그래도 모방하고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으로 우리가 다양한 해석을 하면서 문화와 세계가 넓어진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했어요.

지금의 민주주의에서 어떤 천재 혹은 영웅이 등장하여 어떠한 사상과 이념을 논리정연하고 체계적으로 전개를 한다고 생각해보죠. 이러한 논리가 타인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그저 이런 주장에 인터넷 커뮤니티 용어로 "알빠노?", "누칼협?" 이런 반응으로 푹 쑤셔넣으면 설득은 커녕 대화조차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로 저는 예술이 사람의 감정을 건든다고 보는 거죠. 어떠한 독자 혹은 감상자가 예술작품을 능동적으로 해석하면서 자기 자신의 기존의 선입견과 편견이 붕괴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변화의 가능성이 생긴다는 거죠.


잠깐 고대 철학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각각 바라본 예술에 대한 시각을 봐볼게요.

플라톤은 예술(시)을 매우 두려워했던 것으로 생각이 돼요. 바로 이 감정을 건드리는 부분 때문인 거죠. 예술은 사람들을 그저 현혹시키고 정신 못 차리게 만드는 마약 같을 수 있다는 거죠. 우리가 단순히 감각적인 예술에만 푹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된다면 현실 속의 우리의 모습은 엉망이 될 테니까요. 현대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한 비판에도 해당이 되겠죠.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예술의 개연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카타르시스(감정의 정화)를 이끈다고 본 거죠. 그 카타르시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목한 비극을 통한 공포와 연민의 감정 속에서 탄생하는 거고요. 그리고 이것이 모종의 "지적 각성"을 유도할 수 있다고 본 거죠.

우리가 인문적 예술이라는 건 플라톤이 공포스러워했던 것처럼 그저 예술적 세계에만 빠져서 현실도피적인 면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내가 기존의 관점과는 전혀 다른 행위와 실천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는 거라면 인문학은 이 영역에 주목을 하겠죠.

결론적으로 예술이 감정을 건드는 것엔 특히 나의 고정관념, 선입견과 편견이 깨지고 내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한다는 거죠. 그리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목적을 세울 수 있도록 한다는 거고요. 앞서 미적 판단이 이런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는 거고요.

현실의 우리는 모두 이해관계 안에 있고 이해관계 속에서 그저 규정하는 판단을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해관심 속에서 이기적일 수밖에 없죠. 그러나 문학의 이야기구조를 따라가다보면 나의 이해관심에서 벗어나 이야기의 관심을 따라갈 수 있죠. 우리가 타자와 만나는 게 이 부분이겠죠. 앞으로 설명하게 될 종교가 없다면 우리는 예술에 더욱 더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이때의 예술은 당연히 자본주의 속 이해관계의 논리 속에 그저 종속된 사람들의 기호와 취향만을 반영하는 상업 예술이 아니겠죠☺

 


그리고 이제 종교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저는 인간의 모든 의미들, Fiction들을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신(God)이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접근을 했어요.

신은 인간이 꿈꿀 수 있는 모든 이상과 완전함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거죠. 완전함 그 자체이죠. 그런데 반해 현실의 인간은 불완전합니다. 인간은 다수이며 유한한 육체를 갖고 있죠.

아주 흥미로운 지점은 인간은 분명 불완전하지만 완전함을 "상정"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는 완전한 삼각형이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은 완전한 삼각형을 상상할 수 있죠. 우리는 개별적인 것들(철수, 영희)로부터 보편적인 것들(인간)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신 존재 증명도 이루어져왔죠.

그렇다면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게 어쩌면 종교인의 모습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죠. 이제 기독교를 다시 끌어들인다면 기독교에서의 신은 전지하고 전능하고 전선합니다. 원죄를 가진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종교인인 거겠죠. 그 속에서 신을 믿는 만큼 이웃들을 사랑하면서, 타인을 이해하면서 신에 가까워지는 거죠. 불완전한 인간들끼리 결합하여 완전함으로 나아간다고 볼 수 있는 거고요.

그런 지점에서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신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고난"과 "역경" 이겠죠.


여기서 제가 잠깐 우리에게 익숙한 장발장(레미제라블) 이야기를 해볼게요.

장발장은 성당에서 묵다가 미리엘 신부의 은쟁반을 훔쳐서 달아납니다. 그런데 자베르 경장이 이를 발견하고 장발장을 잡아서 미리엘 신부에게 데려다 놓죠. 그리고 자베르 경장이 이야기를 하죠. "신부님, 장발장이 당신 성당에 있는 은쟁반을 가져간 것 같습니다. 이 도둑놈 처벌해야 합니다."라고요. 그때 미리엘 신부는 이야기를 합니다. "장발장, 왜 은촛대까지 챙기라고 했는데 은쟁만만 가져가셨나요?"라고 하죠.

이 짧은 일화를 해석해볼 때 장발장은 분명 미리엘 신부의 이해관계 관점에서 "손해"를 입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리엘 신부는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장발장을 용서했죠. 그리고 그 이유에는 미리엘 신부가 신부라는 점에서 보았을 때 신앙의 영역 때문이라고 우리가 추론해볼 수 있겠죠. 신을 믿고 사랑하기에 타인도 믿고 사랑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거고요.

여기서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떠한 굳건한 믿음, 신념을 갖는다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라는 사고 방식이 작용한다는 거죠. 고난과 역경, 시련이 내게 찾아오더라도 신앙, 신념을 통해 이를 극복해내고 실천해 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세상에 종교인은 아니더라도 종교적인 사람은 존재할 수 있는 거죠. 어떠한 이념을 믿고 나아가는 사람을 우리가 생각해본다면요.

즉, 신은 분명 불완전한 인간에게 결고 닿을 수는 없지만 닿아야만 하는 지향점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추구(Pursuit)의 대상이 된다는 거죠.

인문학에서 말하는 이념과 사상은 이 "완전함", "신"으로 향하는 다양한 방법론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죠. 그렇게 우리는 나의 이해관계, 편견, 선입견 바깥으로 나가는 겁니다.


조금 더 쉽게 접근해봅시다. 거창하게 신을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개념 앞에 '진정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볼게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러한 개념들을 완전함 정도의 극단으로 접근했을 경우 불완전하고 유한한 인간은 이러한 개념 앞에서 늘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도저히 용서할 수조차 없는 것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근데 개념의 완전성을 염두에 둔다면, 신을 염두한다면 이는 다시 가능해지는 거죠.

그래서 종교는 완전함으로 나아가고 선(善)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실천과 연결이 되어 있고, 항시 도덕과 연결이 되어있다고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정치철학의 영역에서 신은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A, 사람B, 사람C, 사람D, 사람E를 신(God)이 중심에서 매개하고 있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신은 공동체에 있어서 공통분모와 교집합으로서 작동을 한다는 거죠. 서로 다른 다양한 개개인들을 하나로 엮어줄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가 되는 것입니다. 신은 하나의 질서가 되고 도덕이 되겠죠.

다만 현대에서는 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신은 과학적으로 증명하기도 힘들고 특정 종교단체의 부정적인 모습들이 우리의 불신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애국심, 공동체의식, 연대감 등을 찾아보기가 힘들죠. (최근에 윤석열 사태 같은 위기 상태에선 드러나긴 했죠🥲) 게다가 우리는 신도 안 믿죠. 그렇다면 서로 다른 우리를 엮어줄 수 있는 무언가가, 우리가 공동의 목표로 삼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까 제가 인문학적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죠. 어떠한 좋은 것에 대한 선(善)에 대한 믿음, 희망의 영역이 없다면 우리는 이대로 몰락하게 될 가능성이 크죠. 그게 우리 사회의 하나의 부정적 전망일 수 있는 거죠. 



+) 실존주의

여기에 한 가지 더, 현대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실존주의를 하나 덧붙여봅시다.

우리 방(N의 언어)가 일종의 교회 같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죠. 서로에 대한 인정과 존중, 공감과 배려가 선행되는 분위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종교단체 같은 면이 있는 거죠.

그리고 N의 언어가 곧바로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이러한 부분들이 어떠한 집단적 분위기를 강하게 형성하게 된다면 그 집단 속에서 "자기 자신"은 사실 잘 드러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집단주의가 전체주의로 변질되어 버린다면 어떤 누구에게도 개개인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태까지 일어나게 되어버리는 거죠.

실존주의, 특히 그 속에서 알베르 카뮈가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내가 진정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은 어쩌면 이 분위기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순간일 수 있다는 거죠. 그것은 기존의 구조와 질서에 저항하는 모먼트일 것이고요. 카뮈의 반항이라는 개념이 이걸 말하고 있죠. 눈치가 빠른 분들은 이 부분이 예술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겠죠. 네, 맞습니다. 이 자체가 예술작품은 아니더라도 예술적 모먼트라고 말할 수 있겠고 창조적 행위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실존주의가 말하는 건 이것의 전제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 물음을 통한 실존적 각성이 먼저 필요한 거겠죠.

그러니까 실존주의에서 말하고 싶은 건 나라는 독특하고 자유로운 주체가 그저 주어진 상황에 대해 말려들어가고 이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과거를 재해석함으로써 의미를 창출하며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죠. 마치 제가 앞서 일화를 이야기했듯, 주변 분위기에 이끌려 망나니처럼 살았던 사람이 반성하고 개심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도 이 영역인 거죠. 그 반성하는 시점에 자기 물음이 전제되어야 하겠고요.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해야 하는 건 다시 타인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이러한 실존적인 모먼트를 품는 것이라고 저는 보고 있어요. 그들의 생각을 우리의 문화로 담아낼 수 있다면 세계가 확장될 수 있을 테니까요. 아까 예술에서 이야기헀던 이정표와 같은 거죠.

저는 실존주의를 꽤 좋아하고 주창하는 사람이지만요. 어쩌면 진정한 실존주의가 실현되려면 이 방(N의 언어)을 나가야 할지도 몰라요. 아주 극단적으로 말해서 여기서 우리가 하는 것이 무지성 공감이고 외집단을 배척하려는 요소가 있다면 더더욱 그래야 하겠죠. 당연하지만 제가 운영하는 방으로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웃음) 그냥 좀 더 와닿는 예시일 뿐이죠 😁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누군가가 좀 특별한 관점에서 독특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몰아갈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하나의 문화로 반영해 가는 것이 맞지 않냐는 물음인 거죠. 다른 사람의 예술적 모먼트를 하나의 문화와 세계로 포섭해가는 것이죠. 그리고 여기에 미(美)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마치 미적 판단이라는 건 그런 거죠. "아직은 뭔지 잘 모르겠어. 근데 무언가가 있어!"라고 판단하는 그 순간인 거죠. 그 판단은 나의 편견과 선입견이 깨지고,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의미에서 새로운 의미로 넘어가는 그 순간을 말할 겁니다.

"와! 이거 대단한데?", "나도 무언가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영역으로 나아가게 되는 거죠. 하이데거가 개인의 각성이 공동체의 각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본 것도 이 영역인 겁니다. 우리 역시 실존주의자의 실존적인 모먼트를 통해 나의 실존을 자각하고 변화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거죠.


우리 한 번 아주 러프하게 바라봅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우리가 실존주의자 행위를 마치 예술처럼 우리가 아름답다고 판단하면 우리 역시 달라지고 변화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그게 결국은 미학의 핵심이고 우리가 문화적 확장을 하고 근대식 표현으로 정신적인 진보(Progress)가 일어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위 도식의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후자의*타인 이 우리가 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의 무한 반복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도 때로는 실존주의자가 되어야 하겠죠. 상황에 그저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아실현(자기실현)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요. 이 부분은 첫 번째 강연 <자아실현과 윤리>에서 좀 다루었습니다.

조금 다른 예시긴 하지만 MBTI를 우리가 한 사람의 예술적 모먼트로 봐보죠. MBTI와 8기능은 우리 방(N의 언어)에서 자주 언급됩니다. 우리가 MBTI를 처음 접할 때 그것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었어요. 이때 우리는 MBTI를 낯설고 불편하다는 편견과 선입견과 함께 비과학이라며 사이비로 규정해버린다면 나에게 있어서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죠. 우리는 어쩌면 기존의 도덕적 관점, 군자적 관점에서 MBTI를 계속 무시했거나 퇴출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을 거예요.

근데 MBTI에게 뭔가가 있다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의 인식 폭은 더욱 넓어지게 된다는 거죠. 물론 이런 MBTI도 끝지점이 아니에요. MBTI는 제가 앞서 사회학을 비판한 것처럼 인간을 규정하려는 속성이 강하죠. MBTI를 맹신하여 MBTI를 편견과 선입견으로 삼아서 타인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MBTI를 비판하고 극복하여 계속 이를 넘어서려고 해야죠.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다는 거죠. 비트겐슈타인이 이야기한 것처럼 사다리를 오른 뒤에 사다리를 던져버려야 한다고 했듯이, MBTI도 그 다음 단계가 분명 필요한 거죠.

비유1. 세계의 확장 / 비유2. 사다리 타기

이 강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저를 실존주의자로 이해하고 이 강연을 실존적 행위로 바라보게 되고 무언가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사람들과 풍성한 해석과 논의를 통해 나의 편견과 선입견을 하나둘 깨뜨려간다면, 기존의 가치를 넘어서는 또 다른 나만의 지성적인 의미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면 내일의 행위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이걸 미(美)에서 선(善)으로 나아가는 시도라고 보고 있습니다. 기존의 도덕적, 법적, 관습적 관점으로 포착할 수 없는 어떠한 것들을 보여주는 게 예술이자 실존주의적인 것이라면 이걸 아름답다고 인식하며 우리가 이해하고 담지해가며 끌고 나가는 것이죠. 기존의 도덕, 법, 관습, 문화는 여기서 확장을 이룰 것이고요. 그리고 그게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적인 방향성이겠죠. 그리고 틀림없이 그 방향성은 기존의 선(善)이 아닌 새로운 선(善)일 것입니다. 

그렇게 무언가 새로운 것들이 나오면서 우리가 그것을 아름답다라고 인식하고 사람들에게 많이 공유되고 이야기되어지면서 나의 편견과 선입견이 깨지고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워져 사유의 폭이 넓어진다면, 그렇게 고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세계는 계속 확장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반대로 이제 질문을 던질 수 있죠. 왜 고이면 안 될까요? 

이 물음에 대해서 저는 마치 실존주의자들이 하는 것처럼 "네가 누구냐?"라는 존재 물음을 질문으로 던지고 싶어요. 과연 그저 감각적 유혹에 휩쓸려 일상성에 매몰되는 것이 자기 자신이 드러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이보다 더 위험한 건 공동체의 관점에서는 틀림없이 독이 됩니다. 훈련이 없는 편한 군대에는 부조리가 생긴다는 말이 저는 이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지금의 자유주의, 개인주의가 새로운 타인과의 소통과 만남을 가로막게 된다면 이는 출생률 저하 등의 사회적 문제로 귀결되겠죠. (이기적인 사람이 이타적인 사람들로부터 좋은 것들을 뺏는다면, 그리고 이타적인 사람들이 한 명 한 명씩 바뀌어 모두가 이기적이게 된다면 이기적인 행위들이 더 이상 나에게 더 이상 좋은 것들을 가져다주지 않는 것도 여전히 이 영역이겠죠.)

공동체가 무너진다면 개인이 무너지는 건 당연한 일일 겁니다. 그것을 막아낼 수 있는 건 저 너머의 끝 없는 이정표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새로운 이야기들, 새로운 논의들, 새로운 해석들, 새로운 비판들이 있어야 그것이 새로운 가능성과 방향성이 될 것이고 새로운 선(善)이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문화가 창출되고 세계가 창조되는 지점일 것이고요.

기존의 관점을 뛰어넘는 걸 표현하고 포착하고 아름다움을 느끼고 풍부한 해석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결국 미(美)에서 선(善)으로 나아가는 무한한 과정이고 그것이 곧 인문의 영역이라는 겁니다.

이를 정치적 관점에서 이야기하자면 기존의 선(善)이 기득권과 기성세대의 좋은 것들을 뜻하고 그것이 곧, 기존의 질서를 이야기하고 그 안에서 우리를 어찌보면 가두려고 한다면, 우리가 새로운 선(善)을 만들어 이를 대체해 나가는 것으로 보는 거죠. 우리가 기성세대가 된다면 또 젊은 세대들의 선(善)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고요. 인문학이 진보적인 색채를 띠는 것도 이 때문 아니겠습니까?😉

Fiction이 Fact가 되고 Fact가 Fiction이 되는 이 무한한 과정.. 인간이 어떠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다시 행위로까지 나아가는 무한한 과정.. 그게 우리가 갖고 있는 힘을 잘 발휘하는 인문학의 모든 것이겠죠.

네~ 끝입니다. 긴 강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