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
작성자 리
역사 매거진 H
역사는 살아있다
그동안 우리는 역사에서 '당연함'을 배워왔습니다. 특히 나라를 지켜온 조상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랬지요. 교과서에서 가르쳐주는 내용을 보면, 국가라는 지엄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나라를 지키는 선택은 어렵지만 당연한 결과로 보이기도 해요. 우리는 지금 평화의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요. 결국은 '그 시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던 선택'이라고 치부하고 과거 사람들과의 간극은 거대해지죠. 우리는 그런 당연한 역사 의식과 당연한 교훈을 습득해왔어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이런 역사 의식 계보를 조금 뒤틀어 보여줍니다.
귀하가 구하려는 조선에는 누가 사는 거요
<미스터 션샤인>이 특별한 지점은 주연 캐릭터들 다수가 국가라는 지배적 이념을 거스르는 존재들이라는 데 있습니다. 드라마의 주연 캐릭터들 대부분은 사회적 약자입니다. 주인공 유진이 주인 양반에게 부모를 여의고 본인도 죽을 뻔한 노비였다거나, 사대부 여식 애신은 시집가서 남편을 모시며 사는 예의 수동적인 여성으로서의 삶을 강요받는 모습,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한 수모와 분노로 얼룩진 백정 출신 구동매의 과거 등 각자가 지닌 비극과 부조리함은 근대 국가와는 거리가 먼 구한말 조선 사회를 단적으로 말해주죠.
이런 캐릭터들의 배경은 여러 역사 매체에서 으레 보여준 ‘국민으로서의 사명감’이 아닌 개인의 서사에 집중하며 과감한 질문을 던집니다. “호강에 겨운 양반 계집”에서 시작해 “귀하가 구하려는 조선에는 누가 사는 거요?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는 살 수 있소?”로 절정을 꽂는 구동매와 유진의 질문은 작품이 제시하는 ‘다른 역사관’의 전복성을 대표하는 대사죠.
저는 그런 생각도 들어요. 당장 먹고 살기 급급한 백성들에게 이념이 중요했을까? 몇 십년을 이어온 불평등과 핍박을 벗어나려는 간절함 안에 과연 국운(國運)의 걱정은 얼마나 차지했을까? 나라를 지킬 만한 동력과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라는 생각 말이에요.
'역사 문해력'의 힘
<미스터 션샤인>은 그동안 수많은 우리가 배워온 역사 의식인 국민, 국가, 그리고 의(義)라는 거대한 압박에서 벗어난 전위적인 역사관을 공유해요. 종래에 등장인물들은 모두 결국 애신과 같은 길을 걷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라가 아닌 각자의 공간과 공동체를 보전하기 위함이었어요. 국가보다도 ‘나와 내 사람들을 지키려는’ 인간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우선한 선택이었죠.
이렇게 개개인의 선택을 담담히 지키며 나아가는 과정은 오히려 각자의 위대함과 공감을 극대화하고, 불타는 애국심과 민족의 끈끈한 단합을 덜어내고도 숭고한 역사를 조명해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역사 문해력을 기를 수 있어요.
지금 당장 먹고 살기 힘들고 내 앞길 급급한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잖아요. 하지만 지금 우리가 드라마로나마 함께 그 시대를 공유하고 생각해본, "그럼에도 다른 선택을 하게 한 동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질문은 내 삶에 새로운 관점을 더하는 길로 이어져요. "지금 내 세상은 어떤 세상이지? 나는 어떤 선택을 하고 싶지? 내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지?" 이런 작은 생각들이 하나둘 쌓이다 보면 옳고 그름을 가르고 진실을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요. 이게 바로 역사 문해력이지요.
저는 역사는 물음표로 가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방적으로 암기하게만 했던 역사 교육은 우리가 역사에 물음표를 던질 기회를 막았죠. 역사도 결국은 소통이고 공감인데 말이에요. 마음껏 물음표를 던지며 사실에 기반해 진실을 추론하고 나의 생각을 다듬는 과정은 내 삶에서도 적용할 수 있잖아요.
대상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과정을 지금 내 삶의 문법에 적용하는 것. 그게 진짜 역사의 힘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