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도끼를 든 사람이 되자
최근 가장 핫한 마케터를 한 명 꼽으라면 봉화군의 김수성 주무관을 빼놓기 어렵다. 봉화군 특산품인 사과를 알리기 위해 사비 약 33만 원을 들여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광고를 집행했다. 실제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에 '봉화사과'가 등장하는 장면이 공개되자 온라인에서 큰 화제가 됐다.
흥미로운 건 이 광고의 목적이다. 미국에서 봉화사과를 팔기 위한 광고가 아니었다. '봉화사과가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를 국내에서 콘텐츠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 주무관이 산 것은 타임스스퀘어의 몇 초가 아니라,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소재였던 셈이다.
봉화군과 뉴욕 타임스스퀘어. 좀처럼 연결하기 어려운 두 가지를 붙인 것만으로 이야기가 생겼다. AI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요즘, 이 사례를 보며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모두가 비슷한 도구를 갖게 된 시대에는 무엇이 차이를 만들까.
요즘 많은 기업들이 AI와 함께 일하는 법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있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도 클로드 코드와 코덱스 같은 도구를 활용하고 있고, 업무에 AI 에이전트를 적용하려는 시도도 늘고 있다. 지난해부터 이런 도구를 먼저 써온 사람들의 시행착오와 노하우가 콘텐츠로 공유되면서 AI 활용의 진입장벽도 빠르게 낮아졌다.
나 역시 최근 회사에서 AI를 활용해 몇 년 동안 미뤄왔던 일을 며칠 만에 해결했다. 우리 팀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인플루언서를 찾고 협업하는 일이다. 오랫동안 수많은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인플루언서 데이터도 계속 쌓였지만, 파일과 형식이 제각각이다 보니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클로드 코드를 활용해 흩어져 있던 데이터를 분류하고 합쳤고, 약 3일 만에 실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인플루언서 DB를 만들었다. 언론 기사 모니터링을 담당하는 팀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기사 링크만 넣으면 일정한 형식의 보고서가 만들어지는 간단한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몇 년 동안 '언젠가는 해야지'라고 생각했던 일이 며칠 만에 끝났다.
AI를 사용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변화는 일을 대신해준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생각과 실행 사이의 거리가 급격히 짧아졌다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아이디어가 있어도 개발 지식이 없어서, 데이터를 정리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서, 당장 해야 할 업무에 밀려서 포기하는 일이 많았다. 이제는 생각만 있다면 상당 부분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AI라는 비슷한 무기가 모두의 손에 쥐어졌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새로운 콘텐츠와 프로젝트를 만들고, 어떤 사람은 여전히 채팅창에 질문 몇 개를 던지는 데 그친다. 물론 AI를 다루는 숙련도의 차이도 있다. 하지만 도구가 쉬워질수록 그 차이 역시 점차 줄어들 것이다.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의 차이다. AI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먼저 내가 하는 일을 알아야 한다. AI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내가 그 일을 몰라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무엇을 입력해야 하는지, 어떤 과정은 덜어내도 되는지, 결과물에서 무엇을 검수해야 하는지 설명하려면 내가 그 업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원래 이렇게 해왔으니까'라는 이유로 반복하던 업무와 실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업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AI는 데이터를 모으고 정리하고 일정한 형식으로 옮기는 반복 노동을 빠르게 압축한다. 그만큼 사람은 이 일을 왜 하는지,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데 시간을 더 쓸 수 있다.
그래서 AI 시대에는 감으로 아는 것보다 내 일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해질지도 모른다. 동시에 AI가 내놓은 답 밖을 볼 수 있어야 한다. AI는 굉장히 그럴듯한 선택지를 빠르게 제시한다. 문제는 그 답이 너무 그럴듯하다는 데 있다. 몇 가지 선택지를 받아보는 순간 우리는 어느새 그 안에서 답을 고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는데, AI가 A와 B와 C를 보여주면 그중 가장 괜찮아 보이는 것을 고른다. 어쩌면 10점짜리 답이 될 수 있었던 D를 생각할 기회 자체를 잃어버린다.
AI는 생각하는 비용을 낮췄지만, 동시에 생각하지 않는 비용도 낮췄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생각을 AI에게 맡기고, 에너지가 덜 드는 선택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AI가 만들어낸 평균 안에서만 움직이게 된다.
봉화군의 타임스스퀘어 광고가 인상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에게 '봉화사과 홍보 아이디어를 알려줘'라고 물으면 수많은 아이디어를 제시할 것이다. 어쩌면 타임스스퀘어 광고도 그중 하나로 등장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를 누가 처음 떠올렸느냐가 아니다. '해외 광고를 국내에서 화제가 될 콘텐츠로 활용한다'는 맥락을 읽고, 30여만 원을 직접 써서 실행하기로 결정한 판단이다. 결국 좋은 아이디어는 그럴듯한 선택지를 많이 만드는 것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하는 데서 완성된다.
AI 시대에 사람이 해야 할 일도 점점 이런 쪽으로 이동할 것이다.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초안을 만드는 일은 AI가 훨씬 빠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정의하고, AI의 답에서 무엇을 취하고 버릴지 판단하고, 때로는 제시된 선택지 밖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아이러니하게도 AI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일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콘텐츠가 AI 검색에 노출되고 AI에게 선택받아야 하는 시대가 오더라도 결국 제품을 사고, 사람을 채용하고, 프로젝트를 승인하고, 브랜드를 좋아하는 것은 사람이다. 우리는 여전히 고객과 동료를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AI 시대에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생각. 익숙한 두 가지를 낯설게 연결하는 생각. AI가 제시한 선택지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밖을 바라보는 생각. AI가 모두에게 비슷한 무기를 쥐여줄수록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기의 성능이 아닐 것이다. 어떤 생각을 들고 그 무기를 휘두르느냐이다.
AI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마지막 무기는 결국 도끼 같은 생각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