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뭉뚝한 게 아니라, 내가 뭉뚝해지고 있었다
최근 3주간 내가 속한 팀은 제안에 참여하며 정신없는 한 달을 보냈다. 10여 년간 이 일을 해오면서 제안서 작성은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힘든 일이지만, 그만큼 배우고 느끼는 점이 많은 순간이기도 하다. 관성적으로 운영해오던 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동과 계획을 고민하는 과정은 나를 짧은 기간에 성장시킨다. 그래서 많은 업계 선배들이 ‘대행사의 꽃은 제안’이라는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
제안서 작성에는 정답이 없다. RFP라는 문서를 통해 요청 사항을 공유받지만 해석의 여지가 많아, 각 대행사가 저마다의 해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거친다. 보통 제안서 작성에는 2주에서 3주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 안에 RFP 해석부터 제안서 작성, 디자인과 영상 작업까지 한 번에 진행하려면 일정이 상당히 촉박하다.
대부분의 대행사 직원은 제안 외에도 기존 실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제안서를 쓰는 기간의 대부분을 야근으로 보낸다. 이번 제안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날을 야근으로 보냈다. 그러나 제안의 밀도는 이전과 달라졌다. 바로 AI 때문이었다.
이번 제안은 AI 기술이 고도화된 이후, 내가 키맨이 되어 본격적으로 작성한 첫 번째 제안이었다. 기존의 제안서 작업과 비교해보니 AI가 업무의 형태를 많이 바꿔놓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AI와 함께 제안서 작업을 하며 느낀 점을 공유해보려 한다. 첫 번째는 생각을 검증할 수 있는 샌드박스가 생겼다는 점이다. 제안의 핵심은 아이디어다. 제안서 업무의 80~90%는 핵심 콘셉트와 RFP가 얼마나 잘 맞는지를 회의를 통해 검증하고, 아이디어를 더 뾰족하게 다듬는 데 사용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생각과 정보의 밀도가 같을 수는 없다.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콘셉트에는 키맨 한두 명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다. 키맨의 아이디어가 그럴듯할 경우, 제안팀 전체가 그 아이디어에 맞춰 확증편향에 빠질 수도 있다.
AI는 이런 경향을 줄여준다. 어떤 권위나 선입견 없이 아이디어를 평가하고, RFP와의 적합성을 검토해준다.
이번 제안에서도 그랬다. 회의에서 나온 괜찮아 보이는 아이디어를 AI에게 던졌더니 “이 아이디어는 RFP의 ○○ 조건과 맞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사람이 직접 말하면 반박이나 감정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지적이었지만, AI가 짚어준 문제였기에 비교적 감정 없이 회의 테이블에 올릴 수 있었다. 그 지적 하나로 제안의 방향이 다시 잡힌 순간도 있었다.
두 번째는 모호한 생각을 정리해준다는 점이다. 제안서 회의를 하다 보면 무언가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캠페인의 구조나 형식을 이야기할 때는 누군가 머릿속의 그림을 직접 도식화하지 않으면 사람마다 이해하는 내용이 달라지기도 한다.
논리 구조를 말로 설명할 때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 장표로 만드는 과정에서 논리의 허점이나 보완해야 할 지점이 드러나는 경우도 많다. 이런 디테일을 보완하는 데 AI는 큰 도움이 됐다. 인풋과 가이드라인을 정확하게 정리해주면 AI는 작업 시간을 크게 줄여주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까지 짚어주는 훌륭한 도구가 된다.
하지만 동시에 AI의 한계도 여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그 한계는 AI가 아니라 나에게 있었다. 처음에는 AI가 나를 안전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AI는 10점 만점에 5점에서 7점 사이의 무난한 답을 내놓는다. 파격이 필요한 순간에도 안전하고 효율적인 답변만 가져온다고 불평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AI가 안전한 답을 준 것이 아니라, 내가 안전한 답을 원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회의에 들어가기 전 AI에게 아이디어를 여러 번 검증받는 일이 습관이 됐다. 회의에서 누군가에게 반박당하기 전에 미리 검증받고 싶었던 것이다. AI는 그런 나의 요청에 충실히 응했을 뿐이다.
파격적인 아이디어는 원래 반박당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AI를 반복해서 거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파격적인 부분이 사라진다. AI가 뭉뚝한 것이 아니라, AI를 계속 돌리는 내가 점점 뭉뚝해지고 있었다.
두 번째 한계는 개개인의 개성이 개입할 여지가 줄어든다는 점이다. 모두가 AI를 사용하고, 모두가 생각을 검증하는 샌드박스를 이용한다. 그러다 보면 대체로 비슷한 결의 아이디어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회의를 하는 이유는 다양한 가능성을 펼쳐놓고 함께 논의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AI라는 필터를 거친 뒤 나온 아이디어는 이미 한 번 정제된 생각이다. 날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매력이 떨어질 수 있다.
다음 제안에서는 순서를 바꿔보려고 한다. AI에게 먼저 답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내 생각을 여러 갈래로 충분히 펼쳐놓고, 그 안에서 초고에 가까운 아이디어를 만든 다음 AI에게 던져 구체화할 것이다. AI가 나를 검열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날것의 생각을 꺼내놓는 순서로.
AI가 만든 초안에서 승부가 갈리지는 않는다. 결국 승부는 그 초안에서 벗어난 한 문장에서 갈린다.
그리고 그 문장은 어쩌면 AI에게 물어보기 전에만 나올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