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감과 빻은 말 - 책 <도쿄도 동정탑>
작성자 ㅎㅇ
괴로워서 흥미로운 책들
미감과 빻은 말 - 책 <도쿄도 동정탑>
올해 일본의 대표적인 문학상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구단 리에가 논란이 될만한 수상소감을 남겼다. “작품 일부에 챗GPT로 만든 문장을 사용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인공지능이 정말 코앞까지 다가와 창작자를 겨누고 있고, 어떤 창작자는 그 앞에서 항복을 선언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었다. 이런 기운은 진작에 감지됐다. 지난해 영화평론가이자 소설가인 듀나가 챗GPT와 함께 소설 쓰기를 시도한 결과를 ‘인공지능에게 나 대신 소설을 쓰게 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짧은 에세이로 <릿터 42호: 챗GPT와 문화예술>에 실은 적이 있었다. 여러 권의 책을 낸 미국의 소설가 노바 리는 다음 책이 될 글의 초안을 가지고 오래 씨름하다가 챗GPT를 이용해보기로 마음 먹은 후, 아예 <챗GPT와 함께하는 소설 창작>이라는 실용서를 쓰기도 했다. 노바 리는 AI를 활용하는 게 반드시 글쓰기에서 인간성을 걷어내버리는 건 아니라고 첨언했다. 그러나 챗GPT가 만든 문장이 소설에 직접적으로 인용되고, 그것을 포함해 소설의 작품성이 공식적으로 인정 받은 건 드문 일이었다.
구단 리에는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수상 소감을 말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오해가 생겼다고 해명 했는데, 그 내용은 소설 속 인물이 AI 챗봇 ‘AI-built’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 한해 챗GPT의 답변을 인용했고, 챗GPT로 만든 문장은 소설의 전체 분량 중 2% 미만을 차지한다는 거였다. <도쿄도 동정탑>의 분량이 총 184쪽이니 작가가 챗GPT를 인용한 구절은 다 합쳐봐야 3~4쪽 정도가 될 뿐이다. 아쿠타가와상 심사위원단 또한, <도쿄도 동정탑>이 단점을 찾기가 어려운 작품이라는 말과 함께 “심사 당시 AI 사용 여부는 문제되지 않았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어쩌면 이 소설은 챗GPT를 한 번이라도 써봤다면 누구든 공감할 만한 묘사가 초반부터 담겨있기 때문에 시선을 끌었는지도 모르겠다.
“명사형으로 끝낸 질문도 무시하지 않는 것이 문장생성형 AI의 좋은 점이다. 언어이기만 하면 무엇이든 일단 반응해준다. 그는 안쓰러울 정도로 열심히 문장을 쌓아간다.” -구단 리에 <도쿄도 동정탑>
소설 <도쿄도 동정탑>은 여러 주제를 대범하게 건드린다. 어느 날 일본의 어느 행복학자가 도쿄 신주쿠에 ‘타워 건설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높이는 71층. 이름은 ‘심퍼시 타워 도쿄’다. 시민이든 관광객이든 도쿄의 거리를 거닐어보면 어디서든 사람들의 눈에 어렵지 않게 띌 고층 건물이다. 행복학자는 범죄자들을 기존의 열악한 수감시설으로부터 도심 한복판의 아름답고 청결한 타워로 입주시켜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중년의 여성 건축가 ‘마키나 사라’가 할 일은 이 타워를 설계하는 것이다. 사라는 해외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국립 경기장 주변의 호텔에 머무르며 아이디어를 구상하며 시간을 보내는중이다. 새로운 타워를 쌓아올릴 부지가 국립 경기장에서 아주 가깝기 때문이다. 사라는 이 타워가 독립된 건축물이 아니라고 본다. 타워가 세워졌을 때 도시의 전체 경관도 고려해야 하고, 이미 세워진 국립 경기장 디자인과의 조화도 생각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퍼시 타워 도쿄’는 이름만 들어서는 전혀 교도소 같지 않다. 그렇다. 인간은 어떤 용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도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 수도 있고, 기존의 이미지를 덮어버릴 수도 있다. 말이 그만큼 힘이 센 것이다.
이 소설은 범죄자가 ‘호모 미세라빌리스(homo miserábĭlis)’ 라고 불리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라틴어 ‘미세라빌리스’는 비참하다는 의미를 가진 형용사 ‘miserable’에서 왔다. 즉, 우리가 범죄자를 더이상 범죄자라 부르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비참한 상태(= 교도소에 수감 된 상태 = 사회에 어우러지지 못하고 격리 된 상태)에 집중하지 않고 그들을 보다 더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도쿄도 동정탑>은 비범죄자가 범죄자를 동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때를, 강간, 살인, 사기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그를 ‘교도’ 시키는 게 차별일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세계를 그린다. 이런 전제 하에서는 ‘교도관’을 교도관이라 부르는 것도 차별적이다. 우리 중 누가 누구를 ‘교도’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새로이 지어질 타워에서 일하는 교도관은 ‘서포터’라 불리게 된다.
주인공 마키나 사라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언어 교체 과정이 조금 우습게 다가온다. 일단, 사라는 새로지어질 건물의 이름이 ‘심퍼시 타워 도쿄’인 데에 큰 불만이 있다. 사라가 ‘심퍼시 타워 도쿄’란 이름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건 범죄자를 굳이 ‘호모 미세라빌리스’라고 부르자고 합의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건축가는 건물만 잘 지으면 되고 건물의 작명에 관여할 권한은 사실상 없지만, 사라는 적절한 이름을 찾고 싶어한다. 그가 찾은 이름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인 ‘도쿄도 동정탑’이다.
심퍼시 타워 도쿄고, 호모 미세라빌리스고……… 뭐 하나 익숙하게 느껴질 틈이 없는 와중에, 마키나 사라가 자주 자신의 언어적 습관을 되돌아보고 그것으로부터 괴로움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건 시대착오적인 말이에요” (혹은 “그 말은 빻았어요”) 라는 말을 누군가에게 듣는 건 굉장히 낯 뜨거운 일이니까. 우리 역시도 원만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차별적이거나 혐오적인 함의가 담긴 낡은 말을 버리고 이를 대체할만한 용어가 있다면 계속 익히면서 살아가는 중이다.
사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으로서 성숙함을 지향한다. 이를테면, “희한한 타이밍에 침묵”하고는 “잠시 후 머릿속에 있는 누군가와 상의하고 확실하게 허가를 받았다는 듯한 기색으로 돌아와 말을 재개한다.” 그런가하면 “언어와 현실이 괴리되기 시작하기 전에 정리해두고 싶어. 안 그러면 내가 쓰러질 것 같아서.”라면서 종종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한다. 이렇듯 강박적으로 말 실수를 피하려 할 뿐 아니라, 매 순간 적당한 말을 고르는 데에 여념이 없는 사라를 향해 그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곤 하는 애인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은 언어로 만든 집이 아니라 감옥이다. (…) 늘 그녀가 하는 말을 간수가 감시하는 감옥.”
마키나 사라가 딴지를 거는 말 중에는 ‘마마 활동’이라는 용어가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 나이와 소득이 차이 나는 두 사람이 데이트하는 상황을 지칭할 때, 특히 그 중 여자가 더 나이가 많을 경우 이를 모성애에 빗대서 부르는 멸칭이라고 한다. 사라는 왜 일본 사회에서 그런 호칭이 널리 쓰이는지 궁금해한다. 자신 같은 40대 여성 건축가와 명품관에서 일하는 20대 직원 다쿠토가 사귄다면, 사람들은 의심 없이 자신이 ‘마마 활동’ 중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열다섯 살 어린 남성과 사랑에 빠진 이 여성은 그들의 관계를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 고민하며 적당한 말을 찾아간다.
그가 찾은 이 관계에 대한 답은 “나는 너의 아름다움을 착취하고 있다”이다. 누가 이런 관계에 동의할 수 있을까? 그의 연하남 애인 다쿠토 또한 그 말에 크게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사라가 자신의 젊음 혹은 빛남을 탐하는듯 바라보더라도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은 조금도 닳지 않아서라나. (둘 다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 여자가 그 남자를 향해 “너처럼 예쁜 건축물”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단순한 문학적 비유가 아니라 건축이 업인 주인공에게는 어느정도 진실이라는 걸 가늠할 수 있다. 사라는 이와중에도 “아름다운” 이라는 형용사를 자주 사용하는 스스로를 엄격하게 셀프 비판한다. “어휘력이 빈약해, 나는 가난한 사람이야.”
<도쿄도 동정탑>을 읽는동안 나는 요즘 사람들이 어떤 공간을 둘러보거나, SNS 게시물을 바라보며 ‘미감 좋다’는 말을 쓴다는 것, 그리고 한편에는 점점 이 ‘미감’을 언급하는 데에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음을 떠올렸다. 민희진이 뉴진스를 만들었을 때부터 였던가? 미감이라는 게 사람들이 즐겨쓰는 입말이 되었던 타이밍 말이다. 디자이너 출신의 엔터 업계 종사자 민희진은 누누히 자신이 보기에 아름답고, 만족할만한 것들을 만든다고 했다. 반대로 그렇지 않은 걸 세상에 내어놓는 걸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소설 속 사라 또한 건축가로서 아름다운 형태와 질감을 지닌 견고한 건축물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한다. “이건 입밖으로 내뱉어선 안 되는 말이지만, 아름답지 않은 형태와 질감을 가진 물체는 단 하나도 시야에 넣고 싶지 않아. 그래서 추한 형상이 압도적으로 많은 현실을 가끔은 견디기 힘들 때가 있어.”
그런데 자꾸 미감 얘기를 할수록 미감이 좋지 않은 무언가를 견디는 역치도 낮아지는 것 같다. 건축물이나 아이돌이 늘 추하지 않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환상. 이 소설은 그 환상을 토대로 우리가 추하다고 느끼는 대상을 미워하고 저주하는 행위가 주로 일상에서 쓰는 말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연 범죄자나 수감자라는 호칭을 ‘호모 미세라빌리스’로 바꾸어 부르면 범죄율이 줄어들고 세상이 조금 더 살만한 곳이 되는 걸까? 라는 궁금증에 대한 답은 이야기가 끝나도 시원하게 얻을 수 없다. 그렇지만, 말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답은 조금 알 것만 같다.
“매일같이 ‘죽어라’라는 말을 들은 덕에 한 가지 알게 된 게 있어. 세상에는 ‘죽어라’라는 말을 듣고 심장에 칼날이 꽂히는 감각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단순히 동사+명령형이라고 처리하는 인간도 있다는 거야. 짧은 인생인데 좀더 의미 있는 말을 쓰면 좋을 텐데, 하고 혐오중독자를 진심으로 동정하는 사람도 있지.” -구단 리에 <도쿄도 동정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