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소설 읽기법 - 책 <아래층에 부커상 수상자가 산다>
작성자 ㅎㅇ
괴로워서 흥미로운 책들
대도시의 소설 읽기법 - 책 <아래층에 부커상 수상자가 산다>
‘한글날’ 다음날이었던 2024년 10월 10일은 가운데 글자만 달리 하여 ‘한강절’이라 불렸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으로부터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한강 작가의 책은 그 사이 누적 100만 부가 팔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광화문 교보문고 오프라인 매장은 직원들이 재고를 매대에 까는 족족 팔려나갔다. 아시아 여성 작가 중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그 여파는 단순한 느낌과 분위기가 아니라 가시적으로 목격 가능한 현상 그 자체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한강의 연대기를 다룬 여러 기사와 다큐멘터리 등은 이미 그가 6년 전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했다는 점을 짚었다. 노벨문학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꼽히는 부커상.* 지금으로부터 2년 전에는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과 정보라 <저주토끼>가 나란히 부커상 인터내셔널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현재 극장가에서 볼 수 있는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원작인 킬리언 머피의 동명 소설 또한 “역대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소설 중 가장 얇은 분량의 책”으로 알려져 있다.
*부커사 주관으로 운영되어 온 ‘부커상’의 명칭에는 변천사가 있다. 후원사의 변경 건으로 2002년부터 명칭이 ‘맨부커상’으로 바뀌었다가, 2019년부터는 다시 ‘부커상’으로 불리고 있다.
케이트 가비노의 <아래층에 부커상 수상자가 산다>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올해의 경사가 남긴 여운을 유지하면서, 권위에 의해 호명된 문학이 독자들의 마음에 심는 울림에 감화 되면서, 지금 읽기에 적당한 그래픽노블이다. 우선, 이 이야기 속 주인공도 아시아 여성 작가이면서 부커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수상이라는 거대한 이벤트는 창작자 개인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칠까? 이 점이 궁금하다면 <아래층에 부커상 수상자가 산다>를 통해 영예롭게 트로피를 거머쥔지 약 50년이 지난 중견 소설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겠다. 한페이지당 네컷 구성의 그림에 텍스트가 빼곡히 채워져 있으므로, 가볍게 집어 들었다면 글자수가 결코 적지 않음에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같은 학교 출신으로 ‘영문학’ 전공 수업에서 서로의 존재를 알아보게 된 니나, 실비아, 시린.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한 20대 중반의 주인공 3인방이 함께 살고 있는 뉴욕의 어느 집 아래층에는 92세의 독거 노인 ‘베로니카 보’가 산다. 원래 아래층에 갔어야 했는데 잘못 배달된 음식을 직접 가져다주기 위해 셋 중 집에 있던 누군가가 아래층 문을 두드린 걸 계기로 윗집-아랫집 이웃들은 서로 안면을 트게 된다. 생존에 급급한 20대의 시선으로 보기에 90대의 독거 노인 베로니카 보의 삶은 특별할 건 없지만 어딘가 우아해보인다. 알고보니, 그는 데뷔작 <폭동>으로 부커상을 수상한 전적이 있는 소설가였다. 베트남 태생인 베로니카 보는 아직도 많은 여성 작가들이 존경 한다고 말하는 작가인 “빌어먹을 조앤 디디온”의 글을 너무 좋아해서 조앤 디디온의 영향을 받아 뉴욕으로 건너오게 된다. 그리고 비교적 빠르게 성공 궤도에 오른 베로니카 보는 언젠가 <타임스> 서평란에서 자신이 ‘생리 중인 톨스토이’라고 소개된 걸 기억한다. (도대체 그 평론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니나, 실비아, 시린은 각자 ‘책’과 관련된 무언가를 하며 돈을 벌고 싶어한다.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시기와 초봉이 각기 다르고, 그들이 일을 하는 스타일도 전부 다르다. 이를테면, 니나는 알잘딱깔쎈하다. 꼼꼼하게 업무 스케줄을 관리하고, 지루한 프로세스를 완벽하게 체크하며, 다른 사람들도 업무를 스케줄 대로 진행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데에 능한 그는 점점 회사에서 인정을 받게 된다. 친구들 사이에서 불도저라 불리는 니나는 회사 바깥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발견하고 몰아붙이는 데에도 재능이 있는데, 현재 그의 화두는 베로니카 보의 책을 아직 알아봐주지 못한 독자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베로니카 보와 식사를 하던 중에 이런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이다.
“선생님, 젊은 독자를 위해 작품 재출간하시는 거… 고민해보셨어요?”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요? 대중들은 내 작품에 환호하지 않았어요.”
(...)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선생님이 될 수 있어요! 자서전을 쓰세요! 아니면 칼럼! 아니면 재출간된 작품의 서문이라도!”
물론, 니나의 불도저스러움과는 한층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시린 같은 젊은이도 있다.
“우리가 뭐라고 베로니카 삶에 뛰어들어서 무대로 다시 끌어올릴 수 있겠어? 큰 상을 받았고 훌륭한 책도 여러 권 썼고, 이제 다했다 싶으실 수도 있어. 92살이잖아. 계속 뭔가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냥 두자.”
시린의 풀네임은 ‘시린 얍’인데 그의 성(last name) 때문에 중국인으로 종종 오해를 받는 중이고, 중국 시장과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 것이라 예상한 면접관의 착각으로 얼결에 취업이 된다. 그렇지만 그는 필리핀 태생이다. 회사에 입사한다면 앞으로 하게 될 일들을 상사가 설명해주는동안, 시린은 상대가 걸치고 있는 스카프가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월세에 맞먹을 것이라는 걸 재빠르게 계산해내는 캐릭터다. 자본주의의 문법을 온몸으로 체화한 신입사원이랄까? (게다가, 독자들은 시린의 앞에 있는 사람이 걸친 점퍼, 바지, 벨트, 스카프, 가방의 가격을 모두 알 수 있다. 모든 제품의 가격이 이 그림 안에 간이 영수증처럼 딸려 있기 때문이다.)
세 사람과 시린의 어머니가 외식한 날, 시린은 엄마가 찔러준 용돈으로 친구들과 부러 택시를 타고 귀가한다. “뒷자리에 셋이 끼어서 타야 했고 허벅지가 싸구려 비닐 시트에 들러붙었지만 택시를 타면 호사를 누리는 느낌이었다.“라는 묘사는 사회초년생 때의 감각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택시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중에 달빛에 반짝거리는 이스트강을 함께 바라본다. 그것이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건 그 강에 산업 폐수도 섞여 있다는 걸 그들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도시에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풍경 속에 깃든 이면과 복잡한 사정을 알면서도 그 도시와 몇 번이고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셋 중 마지막 인물인 실비아 역시 출판사에서 일한다. 그곳은 “쓸데없이 생각만 많고 줄담배를 피우는 중년 남자가 두서없이 늘어놓는” 이야기만을 골라서 출간한다. 자신이 속한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책들에 도무지 흥미를 가질 수 없는 건 실비아의 자존감을 깎아 먹는다. 그는 출판사 직원으로서 해야하는 일만큼이나 “건강에 좋은 탄산 콤부차, 촉촉한 열대우림 분위기 조성을 위한 떡갈잎 고무나무, 두 개의 향이 번갈아 나오는 딥디크 자동 디퓨저”처럼 상사에게 필요한 물건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알아서 채워넣는 일에 열중한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제목이 미정인 소설을 써내려가간다. 굳이 말하자면, 직장이 나를 고용해준 것에 감사해하지만 결코 그 직장에 올인하지는 않는 중이다.
그는 아직 자기 이름으로 펴낸 책이 없지만 꾸준히 글을 쓰고 있는 사람으로, 베로니카 보의 전작들을 뒤늦게 찾아 읽으며 그 중 부커상을 타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멀어져간 책들을 본다. 그러면서 무엇이 좋은 책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독자로서 실비아의 취향은 다음과 같다.
“(실비아가 생각하는) 걸작의 핵심 요소:
현실에 좌절하는 독신녀
꼬여버린 연인 관계
망가진 친구 사이
실망스러운 성생활
공간적 배경은 뉴욕”
이후 베로니카 보와 실비아는 서로의 미완성 원고를 읽어주는 사이가 된다. 실비아는 같은 집에 사는 친구들을 많이 사랑하지만, 완결되지 못한 글을 기꺼이 공유할 수 있는가는 그에게 또 다른 문제다. 즉, 세 사람은 집세 절감을 위해서만 같이 사는 게 아니라, 각자의 회사에 출근해서도 메신저로 사사건건 연락을 나눈다거나 퇴근 후에까지 저녁을 같이 먹을 정도로 몹시 친밀한 사이지만, 그들은 애초에 모든 것을 공유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이런 인간관계의 기본 조건을 토대로, 이 책은 동갑내기 세사람의 우정과 그 역동을 치열하게 다룬다.
“니나와 실비아는 늘 후렴처럼 되풀이되는 그 말을 꺼냈다. “심리상담을 받아봐!” 셋이 친구가 된 순간부터 둘은 시린에게 심리상담을 권했다. 물론 강요하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직접적인 말 대신 어쩌다 한 번씩 정신건강과 아시아인, 정신건강과 여성, 정신건강과 밀레니얼 세대를 다룬 기사를 보내주곤 했지만 그래서인지 시린은 피오나 응우옌과 예약을 잡았다는 얘기를 꺼내기가 왠지 부담스러웠다.”*
*피오나 응우옌은 시린이 몰래 예약한 심리 상담가 선생님의 이름이다.
세 사람 모두 서로에게 ‘에너지 뱀파이어’ 같은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 하는데, 동시에 각자 짊어지고 있는 무게, 사회 구성원이 되고도 매순간 고민하게 되는 ‘이 일로 평생 먹고 살 수 있을까’ 라는 질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이 잘 느껴진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어른이 되면서 나의 우정은 ‘귀기울여 듣는 것’만큼이나 ‘어려움에 빠진 상대방이 전문가를 찾아갈 수 있는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도록 지켜보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린은 결국 심리 상담 선생님을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진짜 개떡 같은 일을 당한 사람들에 비하면 제 문제는 엄청 사소하다는 걸 아니까 더 바보 같아요. 저랑 친한 베로니카 선생님만 해도 93년을 살면서 전쟁도 겪고 친구들도 죽고, 별일을 다 겪고도 잘 사시는데 저는 고작 이런 문제로 징징대고 있잖아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 시린 같은 동시대 20대 여성들은 ‘엄청 사소한’ 문제를 겪고 있을 뿐인 걸까? 징징거리는 건 나약할 걸까?
결국 이런 질문이 남는다. 이 세사람은 왜 베로니카 보의 소설에 빠져들게 된 걸까? 일과 돈과 우정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며 살아가기도 바쁜 이들에게 문학이란 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걸까?
시간이 흘러, 베로니카 보의 집 위층에 살던 셋 중 하나가 방을 빼게 되면서 온라인에 룸메이트 구인 공고가 올라오게 된다. 최초의 입주 당시 집주인이 장점을 교묘하게 부풀렸던 집. 아늑하지만 충분히 넓고 쾌적하지는 않은 실내. 그렇지만 세 사람이 한 데 어우러져 서로를 빚어나갔던 장소. 나이가 조금 더 들면 무용담처럼 추억할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있었던 그 곳. 이 공고는 어쩐지 다음 입주자가 되어달라고 나를 향해 손짓을 하는 것만 같다.
“단돈 500달러로 그린포인트에서 살고 싶으신가요? 사기 아니냐고요? 절대요. 실비아와 저 시린이 함께 사는 쓰리룸 아파트에 방이 하나 비었어요. 좁은 편이고 창문은 없어요. 하지만 뭐 어때요, 그린포인트인데! 깔끔하고 매너 있고, 룸메이트와 평생 친구가 되고 싶은 의향이 100%인 두 여자와 함께 지낼 수 있답니다! 흡연자, 반려동물, 약속 안 지키는 사람, 거짓말쟁이, 코스프레 중독자, 인종차별주의자는 사절이에요. 성소수자와 일요일마다 집에서 열리는 ‘슬픈 음악회’에 긍정적이어야 해요. 관심 있으신 분은 메시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