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적'인 개자식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 책 <괴물들>
작성자 ㅎㅇ
괴로워서 흥미로운 책들
'입체적'인 개자식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 책 <괴물들>
몇 해 전부터 대중문화를 이야기할 때 유행처럼 번진 말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야기 속 캐릭터가 ‘복합적’이고도 ‘다면적’이면서 ‘입체성’을 가진 존재로 그려져있을 때, 잠시 멈추어 무엇을 보았는지 고민하고 후기를 적고 모임을 열어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 때때로 저 단어들을 포함시켜서 글을 쓰고 말을 한다. 하고 싶은말은 이것이다. 어떤 것도 납작하게 묘사되어서는 안 돼요. 납작함은 이 시대의 금기거든요. 우리는 모두 모순을 가진 존재니까요.
모순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바라볼 때, 문화 평론가이자 시네필, 책 벌레인 클레어 데더러의 <괴물들>은 흥미진진한 책이다. 그는 한 때 로만 폴란스키와 우디 앨런의 영화를 아꼈고, 작품 뿐 아니라 창작자로서의 그들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못했다. 무의식적인 실수가 아니라 의도된 과오를 저질렀다. 그들이 작품 바깥에서 저지른 일들이 작품에 얼룩처럼 묻었다. 물론, 알다시피 작품에는 죄가 없다. 여기서부터 클레어 데더러의 사랑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그가 정의하는 괴물이란 “특정 행동으로 인해 우리가 어떤 작품을 작품 자체로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사람”이다. 바로 로만 폴란스키, 우디 앨런 같은 예술가로서는 천재적이면서도, 도덕성 지수는 제로에 가까운 입체적인 창작자들 말이다.
“음악을 만든 이들이 배신 했는데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어떻게 그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 노래들은 시큼해지고 얼룩졌다. 그들의 노래는 수천 명의 플레이리스트에서 한꺼번에 삭제되었다. 이별의 아픔이 매우 구체적인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괴물들>, 2장
이 책에 나온 윤리적 문제를 일으켰고 적당히 유명한 어느 남성 밴드와 여성 팬들의 이야기를 보며, 나는 내 플레이리스트에 영영 포함될 수 없을 어떤 남자들을 떠올렸다. 언젠가부터 내 문화 생활은 부지런한 ‘캔슬컬처’ 활동을 동반하고 있다. 올 해 가을에는 태일이 성범죄 혐의로 피소 되었고 NCT에서 탈퇴했으며 기획사와의 전속 계약이 해지 되었다. 어느 날 나는 그가 참여한 노래가 몇 곡이나 되는지 세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음 편히 들을 수 있는 노래들(그가 참여하지 않은 노래들)을 추리는 쪽이 더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는 탈퇴한 멤버가 그 팀의 메인보컬이었기 때문이다.
문득, 위너가 5인조에서 4인조로 개편한 후 재녹음 버전을 발매한 일이 떠올랐다. 그들은 특정 멤버가 탈퇴하기 전에 발표된 활동곡을 다시 부른 후 제목에 ‘(4 ver.)’를 기재함으로써, 어떤 음악을 감상하는 일이 더이상 복잡하지 않고 안전할 수 있다는 여지를 명시했다. 결국 뺄셈을 한 후 재녹음을 하는 게 답일까? 그것은 남아있는 멤버들 뿐 아니라 수많은 제작 인력과 그들의 수고를 동원할만큼 가치 있는 일일까? 과연 우리는 (4 ver.) 음원을 듣는동안 문제적 인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클레어 데더라는 서문에서 “누군가 온라인 계산기를 만들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한다. “이용자가 예술가 이름을 입력하면 컴퓨터가 그의 죄질과 작품성을 계산하여 판결을 내린다. 이 창작자의 작품은 소비해도 됩니다, 소비하면 안 됩니다.” 이런 계산기가 있다면 당연히 나는 유료 구독을 할 의사가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계산기를 가지지 못한 나는 자구책을 마련한다. 이를테면, 결혼 중 불륜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온라인으로 수많은 여성들과 DM을 주고 받으며 식인 취향(세상에…)을 드러냈던 아미 해머 때문에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하 콜바넴)을 다시 볼 수 없게 되면서부터 대안으로 드라마 <노멀 피플>의 5화를 보는 것이다. 두 작품의 유일한 공통점은 한여름 이탈리아의 소도시와 주변의 목가적인 정경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콜바넴의 인물들은 이탈리아 북부 크레마에 오래 머무른다. 노멀 피플의 주인공들은 아일랜드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도중에 이탈리아 중부 산토레스테에서 여름 휴가를 보낸다.
이탈리아로 여행을 갈 수는 없지만 그곳의 맑고 뜨거운 햇살이 그리울 때면 나는 언제나 콜바넴의 특정 풍경을 떠올리지만, 그 영화를 다시 보지는 않는다. 대신 부득부득 (제작진이나 출연 배우 중 아직까지는 아무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노멀 피플을 튼다. 그런데 콜바넴의 주연인 아미 해머는 헐리우드에서 퇴출 되기 직전에 페미니즘 운동인 '4% 챌린지’*에 참가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추악함이 없던 일이 될 수 있는 걸까?
*18개월 동안 1번 이상은 여성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겠다는 운동이다. 이는 지난 10년(2007~2018) 간 흥행작 상위 영화 1200편 중 여성이 감독한 작품이 4%라는 점에 착안한다. 이 챌린지의 취지는 헐리우드 업계에서 일하는 감독을 비롯한 배우, 작가 등의 여성 비율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괴물들>은 영화 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타인에 의해 미투 운동이 시작되었던 2017년, 클레어 데더러가 '파리 리뷰'에 기고한 후 수없이 바이럴 된 아티클 ‘괴물 같은 남자들의 예술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서 출발 했지만, 이 책이 오직 괴물같은 남자들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여기서부터는 심호흡이 필요하다. 창작의 역사 속에는 괴물 같은 여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지적이고도 우아하게 말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좋아한다. 나 또한 <자기만의 방> 없이는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제나, 글에 대한 그의 글(작품)이 그(창작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너무나 잘 드러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클레어 데더러는 어느 날 도서관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 형식의 글을 모은 <칼라일의 집과 다른 스케치들>을 읽다가 그가 반유대주의 관련 경솔한 발언들을 다수 기록했음을 알게 되고 이런 질문을 던진다.
“왜 울프의 반유대주의는 잊혔을까? 반유대주의는 버지니아 울프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사소한 일, 가벼운 일, 묻힌 일이다. T.S. 엘리엇과 이디스 워튼과 도스토옙스키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무엇보다 가장 먼저 그들의 문학적 성과부터 떠올린다. 그들의 반유대주의를 직면한 뒤에도 그것을 역사 안에서 그들의 순간과 관련 있는 어떤 것으로, 마치 반유대주의는 그 시대의 날씨처럼 작가들에게 불어닥친 것으로 생각한다. (...) 울프가 ‘얻은 것은’ 진실을 추구한 보헤미안이고, 이것이 우리가 아는 울프의 버전이다. 우리는 그녀의 시대를 고려해 그녀에게 면제권을 주지만(...)” -<괴물들>, 6장
올 해 초, 그래미 어워즈에서 ‘80세에 그래미상 무대에 데뷔한 할머니’로 알려졌던 싱어송라이터 조니 미첼의 무대를 기억하는가? 조니 미첼은 뇌동맥류로 투병 생활을 한 후 회복하여 그날 다시 무대에 올랐고, 자신의 대표곡 ‘Both Sides Now’를 부르는동안 후배 뮤지션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모든 여성 뮤지션들이 그리는 미래의 한 장면이라는 고백이 SNS에서 줄을 이었다. 이 6분 남짓의 무대를 보는동안 나는 ‘진짜 경로 우대는 이런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조니 미첼은 20대에 아이를 낳고 위탁 가정에 맡겼고, 이후 자작곡 ‘Little Green’을 통해 아이를 포기한 자신의 사연을 노래한 적이 있다. 지난 역사 속에서, 조니 미첼은 그의 성취만큼이나 그 성취를 얻기 위해 모성을 버린 여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조니 미첼 같은 여자는 어려운 존재의 진수라 할 수 있다. 개자식 같으면서도 한없이 취약하다. 이 둘의 혼합은 사물의 질서를 무너뜨린다.”
“씁쓸한 폭로와 끝없는 실망이라는 역사의 순간을 헤쳐오면서” 나에게는 내가 알고 싶은 버전의 창작자가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또한 각자의 버전으로 어떤 창작자를 사랑해나갈 것이라는 걸 안다. ‘팬’으로서 이 딜레마를 현명하게 해결해나가는 방법은 여전히 잘 모른다. 때로는 “압도적인 둔감함”을 가진 사람이 부러울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쩐지 납작하지 않은 사랑을 계속해나갈 것 같다.
끝으로, Sceptre 출판사에서 나온 원서 <Monsters>의 표지다. 한국어 버전 표지는 그것대로 무척 강렬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은 여자들의 모습은 원서가 더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