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6] 모두가 행복해야 할 하루들
작성자 allreview
누가 크루즈 낭만적이라고 했냐
❤️[Day6] 모두가 행복해야 할 하루들

늦잠입니다. 이 정도면 일찍 일어나겠다 말을 하지 말아야 할 정도입니다. 8시에 겨우 눈을 떴습니다. 아침을 먹고 9시에 시작하는 김초희 작가의 강연을 들으러 떠납니다.
장장 3시간에 걸쳐 이뤄진 김초희 작가의 이야기는 크루즈에 들었던 강연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름 대학 때부터 영화 동아리를 하면서 꽤 관심을 가져왔다지만, 아직도 모르는 분야가 너무 많았습니다.

점심을 먹으며 친구와 얘기했습니다. “내일 사세보항구에 내리면 이제 여행 끝이야” 끄덕끄덕하더니 말없이 묵묵히 고기를 씹습니다.
“.... 오늘 돈가스가 맛있네” 도저히 어제 진대를 했던 대화상대라고 하기에 무색할 만큼 차가웠습니다.
사실 이 친구는 수영할 생각에 이미 정신이 나가있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이 드나드는 수영장에서 부끄럽다는 마음과 그래도 크루즈에서 수영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노홍철이 강연에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 아무것도 안 하지만 말랬어. 오늘 아니면 끝이야, 이제.” 그 얘기를 듣고 한참을 고민하던 친구가 마침내 수영복을 들고 수영장으로 뚜벅뚜벅 향했습니다.
수영장의 크기는 크지 않습니다. 친구가 팔을 세 번 저으니 끝에 닿을 정도였습니다. 한 7m 정도 되는 길이의 수영장에 그렇게 행복하게 수영을 하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전 수영복도, 수영모도 챙겨 오지 않았고, 애초에 수영을 즐기지도 않기 때문에 부럽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습니다. 짧지만 약 30분여의 수영을 마친 친구가 나와서 흥분한 채 제게 말했습니다.
“이거 바닷물이야. 짜. 근데 생각해 보니까, 내가 지금 태평양에서 수영을 한 거잖아? 말도 안 돼!”
일본에서 일본을 가는데 ‘태평양 수영’을 했다는 말이 어이가 없었지만, 따지고 보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서 그냥 웃어넘겼습니다.

그 이후로도 강연이 2개나 더 이어졌습니다. 이제석 대표님과 승효상 건축가의 이야기를 들으니 또다시 저녁 시간이 되었습니다.
가끔 교회 수련회 갈 때면 느끼는 건데요. 뭐만 했다 하면 밥을 먹으라고 합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밥을 계속 먹으니까 영 께름칙한 느낌이 듭니다. 저녁을 일단 걸렀습니다. 대신 야식을 먹을 생각이었죠.

그린보트의 마지막 강의는 송길영 작가의 ‘호명사회’였습니다. 오랜만에 친구와 함께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강연에 미친 사람처럼 거의 모든 시간을 빽빽하게 강연으로 채웠죠.

송길영 작가의 강연이 끝난 뒤에 친구가 제게 달려옵니다. “빨리! 작가님 책 사!” 일반적으로 작가의 강연이 있는 뒤엔 뒤에서 책을 팔잖아요? 그걸 저보고 사라고 하는 겁니다.
“아니.. 내가 왜?” “인당 1권밖에 안 된대!” “너 거 사면되잖아?” “여자친구 주게!” 이제는 남의 여자친구 책 심부름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뭐 어떻습니까. 이것도 추억이겠죠. 헤어지지만 않는다면요.
방에 돌아와서 친구와 송길영 작가의 강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공통점을 찾았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명사들이 강연이 같은 내용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꾸준히 해야 한다”는 말이 똑같습니다. 강연자들이 서로 자신의 강연 내용을 짜 맞춘 게 아닐 텐데, 나중에 정리해 놓은 걸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똑같은 얘기를 합니다.
명사들은 각자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느낀 내용을 말합니다. ‘내가 성공한 방식은 이것이었다’라는 거죠.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른바 ‘성공의 방정식’ 아닐까 싶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면서 업계의 정점에 이른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나는 좋아하는 게 뭘까' 생각했습니다. 일 하느라 까먹고 있었던 진짜 나에 대한 생각 말입니다. 명확한 답은 찾지 못했습니다.

오늘 일정의 마지막은 ‘하선 안내’였습니다. ‘하선할 때는 여권을 캐리어에 넣으면 안 됩니다’, ‘캐리어 태그의 색깔을 확인해라’ 등등이었습니다.
한동안 그 안내 사항을 반복해서 듣다가 제가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이걸 왜 듣고 있는 거야? 당연한 얘기잖아? 그리고, 크루즈에서 끝까지 하선을 안 하면 여기서 알아서 내보내겠지, 가만히 내버려 두겠냐?” 서로 낄낄대다가 안내 중간에 그냥 나와버렸습니다.
야식을 먹으러 갑니다. 야식은 비빔밥과 국수로 매일 고정돼 있습니다. 매번 야식은 거르다가 처음으로 야식을 먹었습니다. 그동안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을 딱히 믿지 않았는데, 바로 이해했습니다. 고추장 양념에 슥슥 비비니까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나오는 길에 환경재단 직원분과 스몰톡을 했습니다. 그린보트 스탭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자원봉사자와 환경재단 직원. 검은색 목걸이를 하고 계신 분들이었죠. 자원봉사자분들은 면접을 통과해야 자원봉사자에 뽑힐 수 있다고 합니다. 제가 봐도 일을 많이 하십니다. 저도 어지간하면 방에 붙어있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어딜 내 다닐 때마다 눈에 띄었으니까요. 잠은 언제 자시나, 식사는 제대로 하시나 걱정스러웠습니다.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인데 저희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 분 처음 뵀어요.”
평상시 이런 따뜻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단단한 오해가 생겨버렸습니다.
잠시 씻고 다시 이 글을 쓰러 나왔습니다. 시간은 또다시 12시를 넘어갑니다. 배는 조금씩 더 흔들립니다. 5층 선미 제일 끝방 ‘루나 라운지’는 이 선내에서 가장 조용한 곳입니다. 바에서 노래를 부르시던 가수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방에 있는 YTN을 보면서 참..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대한민국은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누가 우리나라를 욕해도 개의치 마세요. 우리나라는 원래 좋은 나라입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내가 세상과 일주일을 격리된 채 살았다는 것을요. 메일함도, 인스타도 열어보지 않았더라고요. 그리고 그렇게 살아도 꽤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디지털 디톡스가 제게는 크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배에서 탄산도, 술 한 잔도, 사 마시지 않았습니다. 와이파이도 구매하지 않았고, 카지노 게임도 하지 않았고, 면세품을 사지도 않았고, 추가 코스요리를 사 먹지도 않았습니다.
바보 같아 보이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전 그린보트를 온 거니까요. 코스타 세레나 크루즈를 탄 게 제 목적은 아니었으니까요.
이곳에서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생각합니다. ‘내일은 또 어떤 일본이 기다리고 있을까.’ 두렵진 않습니다. 이제는 ‘마스터 카드’를 외치지 않아도 되고, 혼자도 아니며, 여행도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취했고, 신나게 춤을 춥니다. 약간 잠에 취해 시니어들의 댄스를 보면 괜스레 웃음이 납니다.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합니다. 제가 만약에 영화감독이 되면 이런 장면 하나는 꼭 넣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해야 합니다. 당연히 ‘우리’ 안에는 시니어도 포함돼 있습니다. 우리네들의 삶이, 오늘처럼, 웃음꽃으로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그린보트 꿀팁 3가지
1. 9층 수영장은 눈치를 보지 않고 즐겨야 한다. 참고로 수영장 물은 바닷물이다.
2. 야식으로 나오는 비빔밥은 한식을 수혈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다. 슥슥 비벼 먹으면 전주 뺨따귀 때린다.
3. 그린보트 자원봉사자는 크루즈를 공짜로 탈 수 있다. 면접을 통과해야 한다. 페이는 없다. 승객들 아무도 자원봉사자들이 고생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니, 한 마디라도 인사를 건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