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갓생? (엄근진) 살지 마세요
작성자 allreview
누가 크루즈 낭만적이라고 했냐
⛔ 갓생? (엄근진) 살지 마세요

[박상영 소설가]
⛔<갓생과 쉼에 관하여>
"창조적인 역량이 샘솟는 갓생이란 없습니다"
박상영 작가는 갓생을 키워드로 강연을 하러 나왔다. 하지만 갓생은 창조와 배치된다고 주장했다. 아니, 단언했다.
이러한 박상영 작가의 단언은 철저한 경험에 기반한다. '왜 쉬어야 하는지' 몸으로 증명한다. '갓생이 파괴하는 (가불적인) 미래의 삶'을 입증한다.
이번 강연의 핵심은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젊은 작가상 수상작으로 읽었을 때 재밌던 기억이 있다. 사실 개인적인 박상영 베스트는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다. 이거 진짜 명작인데 사람들이 모른다. 답답하다.)도, <대도시의 사랑법>도 아니다.
인간 박상영이다. '우리는 왜 현재를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박상영의 대답이다. '최소한 나처럼은 살지 말라'는 호소다.
'한국 문학의 세례를 받은 이'가 또 다른 이에게 '한국 문학의 세례'를 베푸는 간증을 들어보자.

안녕하세요, 박상영입니다. 와주셔서 감사하고요. 다른 좋은 강연이 있을 텐데 저를 선택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오늘 저는 대단한 가르침이나 이런 것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작가가 되었는지, 작품활동을 어떻게 하는지를 근본적으로 얘기하고 싶습니다.
신과 같이 열심히 사는 걸 갓생이라고 합니다. 저는 한 때 갓생의 아이콘이 됐던 적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쉼의 중요성을 어떻게 깨달았는지 말씀드릴 예정입니다. 초반부에 지루하시면 주무셔도 됩니다(웃음). 나를 고난에서 구원한 창조적인 글쓰기를 하는 방법을 쉼과 함께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2016년에 데뷔했고, 올해 ‘대도시의 사랑법’ 드라마가 발표되면서 드라마 작가로도 입봉 하게 됐습니다. 많은 매체에서 저의 주요 업적으로 2022년에 인터내셔널 부커상에 노미네이트 된 걸 거론하는데요. 한강 작가님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상을 받았죠. 후보로는 제가 최연소라고 하더라고요. 그걸 통해서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게 된 것 같습니다.
고난 없이 커리어를 쌓은 사람으로 생각하실 수 있는데, 그렇진 않습니다.
박상영의 연대기를 한 번 보죠. 저는 1988년생이고요. 첫 독서 경험을 한번 생각해 봤어요. IMF로 돌아가게 되더라고요. IMF를 많이 경험해 보셨을 텐데요. 저는 그때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는데요. 아직도 기억나요.
클리셰죠. 차압 딱지가 붙는 일이 있었고요. 하루 걸러 하루씩 회사들이 망하고, 야반도주를 하는 분들도 많았고요. 당시 전업주부로 일하시던 어머니도 생업 전선에 뛰어드셨고요. 그러면서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던 아빠 친구의 딸들에게 맡겨지게 됐어요. 그 집에 맡겨지는 건 공짜니까, 돌봄이나 케어가 있었던 게 아니었어요. 그저 옆에 베개 하나 베고 누워있던 아이였죠.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아이에게 보석과도 같은 공간이 있었어요. 그 집에 큰 책장이 하나 있었는데, 이를테면 양파/서태지 앨범 CD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고요. 그런데 그것보다 책들이 저를 더 매혹시켰습니다.
거기엔 딱딱하고 무겁고 보기 힘든 것들밖에 없었는데요. 해문 출판사에서 나온 아가사 크리스티 추리물이 있었어요. 70권짜리였는데요. 욕망과 치정, 불륜과 살인이 가득하니까 너무 재밌는 거예요. 그야말로 신세계였죠(웃음). 그 책을 모두 다 읽었습니다. 유년기를 저는 살인과 욕망으로 가득하게 보내게 되었죠.
그야말로 지금의 저를 있게 한 책을 많이 읽었어요. 해리포터도 많이 읽었고요, 만화로 된 세계 문학 전집 엄청 재밌게 봤습니다. 그때부터 책 읽는 걸 엄청 좋아했습니다. 저는 독서를 많이 하고, 또래보다 조숙한 단어들을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초2 때 가을에 대한 시를 썼어요. 장원에 당선됐어요. 그거 굉장히 휘갈겨 쓴 거거든요. 쓰라고 하니까 한달음에 썼는데 상을 받았어요. “오, 난 쩌는데? 재능이 있네?” 했어요(웃음). 글 쓰는 자아가 그때 생긴 거죠. 책을 읽는 걸 좋아하고 잘하는 애로써 인식이 됐어요.
2000년대 저는 중학생이었고요. 제가 살았던 동네는 대구였습니다. 대구 수성구에서 자랐어요. 그곳이 학군지라고 불리는 공간이에요. 서울대를 많이 보내는 학교, 학원이 많은 동네죠. 그 특징 중 하나가 빈부격차가 있다는 점이에요. 어마어마하게 빈부격차가 큰 곳이에요.
제가 살았던 아파트가 저희 또래 집단에서는 멸칭으로 쓰였어요. “쟤 무슨 아파트 산대요~”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요. 머리 굵고 나서는 한 번도 친구를 데려온 적이 없었어요. ‘들켜선 안 돼. 이건 나의 약점이 될 거야’라는 자의식이 있었고요.
사실은 이런 종류의 자의식은 늦게 형성될수록 좋은데 이른 나이에 체화하게 된 거죠. 이런 것들을 통해서 빈부의 격차를 느끼게 됐어요. 역시나 10대 때도 불우했던 가정환경이 변하지 않아서 심적인 고통을 많이 겪는 아이였어요. 10대를 앓듯이 보내는 아이가 있잖아요?
중2 때, 처음으로 한국 현대 소설을 읽게 됩니다. 저희 어머니가 돈을 쥐 잡듯이 아끼셨어요. 그런데 아끼지 않은 단 하나, 금과옥조의 조건이 바로 책이었어요. 책을 사는 데는 돈을 기꺼이 내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유일하게 사치를 부릴 수 있는 게 새 책이었어요.
그러던 와중에 읽게 된 책이 <아주 오래된 농담>이라는 박완서 선생님의 책이에요. 밤에 주로 책을 읽는 습관이 있어서 한달음에 새벽 내내 다 읽었습니다. 너무 재밌었어요. 재벌가에 시집간 여자가 불륜인 얘기예요. 멋있죠?(웃음) 제가 좋아하는 치정과 죽음, 돈이 얽혀있어요(웃음). 그 내용의 재미에 놀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이렇게 그럴듯하지?’ 드라마에서 매일 보는 소재인데도 이 작품은 그럴듯해 보인다는 사실에 놀란 거죠.
나와 동시대를 사는 ‘한국의 생존 작가’라는 점에서 한번 더 놀랐어요. 그전까지 제게 작가는 죽은 사람들의 옛날 얘기였어요. 해리포터? 물론 살아있지만 판타지고요. 박완서 작가의 책은 나와 같이 생존한 사람의 현실의 이야기가 이렇게 재밌게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소위 말하는 ‘한국 현대문학의 세례’를 박완서 작가의 책을 통해 입었습니다.
고등학교 땐 제 친구한테 물어봤어요. ‘나는 어떤 애였어?’라는 질문에 ‘체육시간에 스탠드에 앉아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해리포터를 보던 아이’였다는 거예요. 체육시간에 스탠드에 앉아있다? 어떤 애인지 아시겠죠. 불안 초조에 시달리는 거예요. 그 와중에 책을 봐요.
괜히 웃기더라고요. 당시에 저에게 제 삶의 조건은 굉장히 무거웠습니다. 벗어던지고 싶던 것이었어요. 제가 대구에서 태어났는데, 음.. 대구.. 어떤 곳인지 다 아시죠? 보수적이고 답답한 구석이 좀 있고요. 온갖 억압에 시달려야 하는 공간이기도 했어요. 저 같은 아이가 자라나기엔 얼마나 곤란했겠습니까. 현실을 벗어던지고 싶었고요.
그래서 용단을 내렸습니다. ‘어떻게든 서울로 가리라!’
집안 형편이 윤택하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대학 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했죠. 당시에는 수시 1학기라는 게 있었어요. 2학년까지 성적을 가지고 서울에 갈 수 있었어요. 원서비만 해도 수백만 원이 나왔어요. 지금은 원서 개수가 정해져 있었는데, 그땐 무제한으로 쓸 수 있었고 대학이 그런 장사를 할 때었어요. 저도 고대 벽돌 몇 개 쌓아줬어요(웃음).
엄마가 KTX 비용 아끼라고 사촌형 집에 저를 보냈습니다. 그때 신경숙 작가의 <외딴 방>이라는 소설을 봅니다. 각별한 체험이었는데요. 혹시 읽으신 분 계신가요? 2000년대엔 집집마다 꽂혀 있었어요. 베스트셀러였죠. 그래서 저는 그냥 베스트셀러니까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주인공 ‘나’는 정읍에 살다가 서울로 올라가서 야간 산업체 학급에 다니며 주간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는 생활을 해요. 산업화 과정에서 고통당하는 차분한 책인데요. 1970년대 10대를 보낸 1960년대생 여성 작가와 1980년대에 태어나서 2000년대를 사는 나의 내면이 똑같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10대 시절의 고립감과 혈혈단신의 새로운 인생을 꿈꾸는 이 시점의 마음 상태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전율이 느껴지고요. 그게 사실은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니 맘이 내 맘이다’ 이걸 느끼는 경험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그 드문 경험을 책을 통해 하게 된 거죠.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어쩌면 이런 종류의 글쓰기와 작가라는 삶을 한 번 해보는 것도 재밌고 의미 있는 일이겠다’ 싶었죠. 제게는 그런 느낌까지 들었어요. ‘아무도 이해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도 없는 그 마음’이 두 번째 문학의 세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1개 학교에 운 좋게 합격했어요.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게 됐습니다. 너무 행복했어요. 답답한 세상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세상으로 간다는 그것 하나 때문에요.
졸업할 때쯤 고3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너 자퇴 안 했니?”라고 하신 거예요. 제가 생각한 저의 모습은 무난한 사람이라고 인식했었는데, 선생님은 반대로 ‘얘는 언제고 학교를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아이’라고 생각하셨다는 거죠.
되게 신기했어요. 실제로 그랬거든요.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학교가 무너졌으면 좋겠다, 자퇴하고 싶다는 생각 많이 했었는데 그걸 알아보셨구나 싶었어요. 밥 짓는 냄새처럼 ‘그런 냄새를 풍겼구나’ 싶었습니다.
무사히 대학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꿈을 꾸게 됐습니다. 대학 수업을 들으면서 여러 과외도, 알바도 하고요. 부푼 꿈을 안고 나도 ‘난 놈이니까 잘 될 거야’ 했던 거죠.
그런데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벽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거 잘 살릴 수 있는 직업이 뭘까?’ 싶었어요. 어쨌든 소설가의 꿈은 사회가 나에게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그다음은 뭘까. 바로 ‘언론인으로서의 길’이었어요.
문과 학생들이 ‘창조적인 일을 하면서도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은 언론계였어요. 대학 때 열심히 준비를 했어요. 신문방송학과 복수전공도 했고요. 취업 준비를 하던 2013년은 잡지라는 매체가 굉장히 인기가 있었답니다?(웃음)
혹시 에디터를 아시나요. 판타지가 있었죠. 영화나 드라마가 만들어질 만큼 선망하는 직업이 에디터였죠. 저도 잡지사 직원이 되면 긴 분량의 길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었고요.
보통 잡지사는 특별 채용으로 뜨는데, 그때 겨우 자리가 하나 나서 잡지사에 가게 됐습니다.
아직도 그 날짜를 기억해요. 2013년 12월 23일에 면접장을 갔습니다. 당시 면접장 대기장이 너무 추웠어요. 건물은 너무 삐까뻔쩍했는데요. 안이 다 오래돼서 바닥이 다 갈라져 있고 그런 거예요. 직원분들이 전기난로를 갖다 놓았죠. ‘만만치 않구나’ 싶었어요.
면접을 대기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세련돼 보였습니다. 왠지 집 주소가 강남구로 시작될 것 같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거예요. ‘아,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편안하게 면접을 봤습니다.
‘이거요? 제가 학보사에서 썼던 겁니다.’ 등등 편하게 말하고 나왔는데 합격이라는 거예요. 합격할 줄 몰랐는데요. 생각했습니다. ‘여기 진짜 실력만 보는구나?(웃음) 아직 대한민국에 참된 곳이 남아 있구나?(웃음)’ 그.. 여담인데, 친구가 전 실력파 작가라고 했었는데(웃음) 그 말이 생각나네요.
얼마나 부푼 꿈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야말로 처음으로 사회인이자 직장인으로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된 거죠. 사수 선배가 밑에 기자들을 가르쳐주는 도제 시스템이었는데요. 입사 후에 알고 보니까, 사수 선배가 3년간 총 7명의 기자들이 왔다가 떠난 경험이 있던 사람이었어요. 다른 잡지사에서도 알고 있을 만큼이요.
처음부터 심상치 않으셨어요. 인사해도 데면데면하시고요. 여러 어록이 있어요. 제가 잘 웃는 상인데, 선배님이 말할 때마다 ‘너는 왜 이렇게 계속 웃니, 조증 걸린 사람처럼?’ 그때 도망치지 못했죠.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같은 게 없을 때였고, 꼰대라는 단어가 사용되지도 않을 때였어요. ‘신입은 원래 개집살이다’라는 말이 있을 때였죠.
잡지사는 월마다 마감을 하는데요. 그때마다 교정 교열을 보는 문화가 있는데요. 밤새서 일할 때 야식을 배달해 먹습니다. 회의실의 큰 테이블에 족발을 놓고 수저를 쭉 깔았어요. ‘준비 다 됐습니다~’ 한 거예요. 간장 종지를 툭 치시더니 “이거 왜 안 깠니?” 하시는 거예요.
아니 손도 발도 다 있으시면서(웃음). 죄송하다고 하면서 까드렸어요. 그리곤 제게 묻습니다. “너는 형제 관계가 어떻게 되니?” 저는 외동이라서 그 말을 되게 싫어했어요. 멸칭으로 쓰이면서 사회적인 함의가 있는 단어가 ‘외동’이라고 느꼈으니까요. “아, 그래서 못 배웠구나?”라고 하시는 거예요. 촌철살인이에요. 오죽하면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겠습니까(웃음).
‘이 사람 진짜 대단하다’ 싶었죠. 저뿐만 아니라 제 여자 동기가 있었는데, 저희를 앉혀 놓으시고 막 얘기하시다가 “요즘 애들은~”으로 시작해서, “호돌이가 88년에 방사능을 뿌려놓고 갔나?”라는 말씀을 하실 정도였죠. 그분이 소설가 했어도 잘했을 것 같아요(웃음).
‘아 진짜 못 견디겠다’ 싶었는데, 떠나기로 결정한 계기가 있어요.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제 동기가 원형탈모에 걸렸어요. 단발머리 여자애가 뒤통수에 구멍이 생겨서 신사동에 주사를 맞으러 다녔어요. 피부과 갔다고 하면, 밥을 드시다가 “요즘 애들은 식사시간도 업무의 일부인 걸 모르나 봐.”라고 하시더라고요.
‘아파도 병원조차 쉽게 못 가는구나. 이 직장은 다녀선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전화 50통 걸어서 어렵게 섭외한 인터뷰를 바꿔치기당한 적도 있었고요. 무엇보다 ‘내가 글을 쓰러 왔는데, 전달자로써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구나’ 싶었죠. 내 선배의 모습이 내 미래인 거예요. 그게 너무 끔찍하더라고요.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선택을 하게 된 거죠. 배수의 진을 쳤습니다. 잡지사에서 제가 한 달에 120만 원을 받았는데요. 돈이 많지 않았어요. 물론 돈은 모았습니다. 직장에서 9-23시까지 있으니까요. 주말 출근도 하고요.
결심합니다. ‘나는 대학원을 가야 되겠다. 소설을 쓰면서 2년간 내 자신을 테스트해 보자.’ 한 거예요. 만약에 될 놈이면 ‘돈 열심히 벌 수 있고 폭언 안 당하는 직장에 가자’라고 마음을 굳혔어요.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첫 학기에 처음으로 소설을 써서 공모전에 냈는데 최종심에 들어갔어요. ‘역시, 난 천재였어.’(웃음)
금방 유명해졌어요. “니가 걔니?(웃음)” 일진들이 ‘여기 짱이 누구야?’ 물어보는 것처럼요.(웃음)
열심히 글을 썼습니다. 일주일에 단편소설 하나 쓴 적도 있어요. 일주일에 한 편씩 썼으니까 한 달에 6-70장씩 쓴 거예요. 그런 걸 할 정도로 에너지에 가득 차 있던 시절이었어요. 하나둘 공모전에서 떨어지더라고요. 제가 떨어진 공모전의 개수가 50개가 넘었습니다. 저를 꺾고 작가가 됐던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손원평, 김멜라.. 너무 절실했던 거죠. 공고가 나면 ‘니가 얼마나 잘 썼길래..’ 그러면서 소설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당시엔 그게 너무 절실했던 문제였는데요.
내가 약속했던 시간은 지났고, 빚은 2천만 원이 넘었고요.
저는 그냥 급하게 직장을 구해서 계약직으로 들어갔어요. 제가 얼마나 열패감이 심했겠어요. 너무 미련이 남고, 너무 힘들고 괴로웠어요. 일 하는 게 하는 것 같지가 않고요.
저는 무속의 힘에 기댔습니다. 그때까지 모태신앙이었는데, 지금은 다니지 않지만요. 용하다는 점집을 소개받아서 갑니다. 연초에 갔는데, 7-8월에 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자꾸 불면증에 시달려서 새벽 4-5시에 깨는 거예요.
원래 직장 다닐 때는 잠이 안 와도 눈을 감고 버티고 있었는데요. ‘그 시간을 이용하자!’하고 바로 씻고 나가서 새벽 5시에 탐앤탐스 가서 글을 쓰고 8시 57분까지 글을 쓰다가 회사 건물로 뛰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2편을 완성했습니다. 제가 물어봤어요. 제 대학원 친구들한테요. ‘글 쓸 때는 너무 진지를 빤다’고 하더라고요(웃음). 말하듯이 쓰래요. 아니 내가 박진영도 아니고, ‘말하듯이 글을 쓰는 게 가능한가?’ 싶었어요(웃음). 아니 이미 등단한 프로 작가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입으로 계속 중얼거리면서 미친 사람처럼 글을 씁니다. 새벽 5시에 나타나서 창가 자리에 앉아서 혼자 중얼중얼거리면서 랩을 쓰는 기분으로 내 마음속 얘기를 썼고, 창비에 냈는데요. 2016년 7월 20일에 전화가 왔어요. 신인상 공모에 당선됐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제 인생이 2개로 쪼개진다고 생각해요. 이 날 이전과 이후요. 그 이후의 삶은 정말 다른 삶을 살게 됐습니다. ‘작가’가 됐잖아요? 얼마나 부푼 꿈을 가지고 있었겠어요. ‘세상을 다 뒤집고 찢어놓으리라’ 했습니다.
어머니가 서울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올라오셨는데, 갈비탕을 먹다가 모조리 고기를 다 넘겨주셨어요. 엄마가 ‘어금니가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임플란트 하려고 어금니를 다 빼셨는데, 다시 임플란트 박으려면 720만 원이었고요. 당시 문학동네 신인상 상금이 1천만 원이었고, 세금 떼면 750만 원입니다. 다 녹였죠.
그래서 똑같이 이 생활을 반복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당시 정말 잘 나가던 소설가들의 평균 연봉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물론 기준이 조금 애매한데, 진짜 책 많이 파는 작가와 달리 신인 작가들은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하는데요. 4개 지면에 모두 소설을 발표하는 건 진짜 주목받는다는 거예요. 그걸 다 모으면 6-700만 원 정도예요. 너무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때 연봉이 600만 원이었어요. 택도 안 되죠. 투잡 생활을 했어요. 고생 끝인 줄 알았는데 그게 시작이었어요.
2018년까지 첫 책을 내는 데 직장생활을 계속 이어갔어요. 저녁엔 널브러져 있고, 잠도 못 자고요. 그래도 내 연봉은 많이 늘지 않았어요. 원 없이 내가 좋아하는 얘기만 하자. 20대 때 죽도록 연애했었거든요. 연애 안 하면 죽는 사람처럼 이요(웃음). 그럼 사랑에 대해서 정리해 보자는 마음으로 쓴 책이 2019년 ‘대도시의 사랑법’이었고요. ‘우럭 한점 우의 맛’이란 소설이 화제가 됐고, 베스트셀러가 됐어요. 자고 일어났더니 1쇄, 또 자고 일어났더니 2쇄. 한 달에 몇 만권이 팔린 거예요. 1달 반이 지났는데, 연봉을 뛰어넘었어요. 제가 목표했던 바를 이룬 것이었죠. 그리고 등단한 지 3년 만에 퇴사를 하게 된 거죠.
그때 제가 갓생의 아이콘이 된 게 있어요. 한겨레 기사인데요. “몸 안 사리고 쓸 겁니다.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라는 제목의 기사였는데요. 이 인터뷰가 트위터 등에 바이럴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조회수가 몇 백만 회가 떴어요. 이 기사가 책 보다 더 많이 알려져서 제 대표작이 됐습니다(웃음).
전 이게 특이한 건지 몰랐어요. 이게 유일한 방편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산 거거든요. 사람들이 이 생활에 열광하고 충격받고 경악하는 거예요. 댓글에 막 “나도 이제 갓생 살기로 다짐했다.”하는데, 이 중 하나가 “나는 박상영이 싫다. 내게 성실을 강요한다.”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주위 평론가 선생님들도 격려해 주시고요. 당시에 대외적으로는 많은 찬사를 받고 각광을 받았는데요. 퇴사도 했어요. 그런데 병원 다니다가 일주일이 끝났어요. 실제 제가 진단받은 병을 보면 ‘만성 고도 비만, 조울증, 불면증, 목디스크, 역류성 식도염, 번 아웃’이었어요. 지금도 책상에 노트북을 놓고 글을 못 써요. 아이 레벨이 내려가면 10-20분만 있어도 못 써요. 제 담당의 선생님이 책을 쓰셨는데, 책 속의 대표 사례로 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웃음).
‘작가님처럼 살고 싶다’는 분들을 봅니다. 제 일상은 꿈을 이뤘는데도 너무 불행하고 아픈 거예요.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어요. 그래서 깨달았습니다.
‘창조적인 역량이 샘솟는 갓생이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에 3시간씩 쪼개서 써서 이 정도인데, 하루 통으로 주어지면 난 3년쯤 뒤에 노벨상을 받지 않을까?’ 싶었어요. 물론 못 받았죠(웃음). 내 삶은 권장할만한 삶이 아니라 끌어다 쓴 체력이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됐습니다.
전 진정으로 쉬고 싶었어요. 제가 그때 여러 의사 선생님들을 만났는데요. 모든 종류의 의사 선생님들이 다 똑같이 쉬라고 하셨어요. 그전까진 별로 쉬어본 적이 없었어요.
처음엔 휴식이 여행이라고 생각해서 막 다녔어요.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태국 등등을 다녔어요. 이게 쉬어지겠습니까? 쉬는 것도 일처럼 쉰 거예요. 여행하면서 책도 썼어요. 이런 저를 두고 김이나 작사가님께서 제가 쓴 책에 추천사를 써주셨는데요. 저랑 같이 라디오를 5년간 해주셨던 연이 있었어요.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박상영과 나는 잘 쉴 줄 모른다. 불안과 게으름 그리고 완벽주의가 만난 환장의 콜라보다.”
그래서 제가 공부를 했습니다. 저처럼 쉬지 못하고 계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휴식 솔루션을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한 심리학자가 10년 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요인이 뭔지를 연구했대요. 흔히 생각하는 부, 건강, 인간관계, 친구, 배우자 등등 이건 연관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유의미하게 연관되는 게 현재의 행복지수래요. 지금 행복한 사람이 미래에도 행복할 것이다. 미래에 행복한 방법은 지금 이 순간 행복한 거다라는 거죠. 저는 항상 되어야만 하는 것, 해야만 하는 게 있었던 사람이었어요. 뒤늦게 깨달은 거죠.
진정한 휴식을 위해서는 나를 공부하라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어요. 자신의 과거사를 치밀하게 살피라고 하셨습니다. 저처럼 끈기가 없는 사람이 계속해서 한 일들이 몇 개가 있나 떠올려보니까요.
첫째론 글쓰기죠. 많은 사람들이 취미가 직업이 돼서 좋지 않냐고 말씀하시는데요. 그건 취미를 하나 잃는다는 의미입니다. 단언합니다.
제가 아기 스포츠단을 나왔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영을 7년 다녔어요. 굉장히 많은 걸 느낄 수 있었죠. 내가 수영을 좋아하는구나 싶었습니다. 능동적인 놀이를 해야 진정한 휴식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릴스 보고 드러누워있는 거 말고요.
능동적인 휴식이 필요하다는 건데요. 몇 개의 특징이 있습니다.
일상적이고, 주도적이고, 깊이가 있고, 긍정적인 연대효과가 있고, 자기 목적적이면 좋다고 합니다. 진단해 볼 필요가 있어요. 삶과 휴식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도 합니다. 머리를 쓰는 직업은 몸을 쓰는 여가를 해야 하고, 몸을 쓰는 직업은 머리를 쓰는 여가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일에서 결핍된 부분을 휴식을 통해 채워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게 온전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겁니다.
이 강연까지 들었는데, 자잘한 팁이 또 필요하잖아요? 이 박상영 작가의 신변잡기만 가져갔다고 하면 껄쩍지근할 것 같아서요.
마이크로 수면의 중요성인데요. 20분의 짧은 수면이 34%의 업무효율향상을 가져온다고 합니다. 제시 폭스 박사님은 이랬대요. 이별한 연인의 SNS를 보는 사람이 감정 회복이 더디다는 거예요. 모든 연락수단과 SNS를 차단하는 그 순간부터 이별이라는 겁니다. 쉬러 갈 때는 그러니까 짧더라도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나야 했습니다. 쉴 때는 일할 때의 나를 깡그리 잊고 떠나야 합니다.
커피나 차를 마시는 시간이 나를 리셋하는 시간이라는 거예요. 마음 놓고 쉬세요. 24시간 동안 깨어있는 쥐에게 커피 향기를 맡게 하면 스트레스가 줄어든대요. 이미 잘하고 계시겠지만요.
사실 제가 준비한 팁은 여기까지고요. 정리해 보자면 정말 잘 쉴 줄 몰랐던 한 인류가 잘 쉬어보자는 메시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질문해 주시는 분들에게 제 사인본을 드리려고 합니다.
QnA

-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님의 문장들이 많이 꽂혔어요. 문장을 쓰는 힘이 뭔가요?
= 타고나는 것 같아요(웃음). 죄송해요. 반에서 웃긴 애들은 3살 때부터 웃겨요. 타고난 애들을 못 이기는 것 같아요.
후천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건 관찰력이에요. 제가 청력이 좋아요. 버스탈 때나 카페에서도 너무 잘 들려요. 작업하다가도 그걸 들으면 막 재능이 발현돼요. 그런 관찰력이 답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 연애를 쉼 없이 하시는 비법이 있나요?
= 근데... 원래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듯이 미쳐있으면 돼요(웃음). 없으면 못 살 것 같으니까 그런 거예요. 10년 치 연애 과정은.. 음.. 전 친구들 사이에 미친 연애의 대가였어요. 그거를 권장해 드릴 수는 없고요.
다만 그냥 내가 좋은 연애를 하기 위해서는 나로서 존재할 수 있을 때 상대방을 상대방으로 볼 수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안 해도 상관없어요. 뭘 그렇게 연애를 하나... 트렌드이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사랑은 뭔지 궁금합니다.
= 너무 심오한 질문이네요. 제가 생각하는 사랑을 썼던 책이 있어요. 한때 끝없이 타올랐다가 나를 잿더미처럼 사라지게 만드는 매우 추악하게 만드는 감정이라고 했던가. 사랑의 탐구보고서 같은 책이 <대도시의 사랑법>이에요. 그 해답을 너무 내고 싶었어요. 그 책 전체가 질문에 대한 해답이자, 탐구 기록이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책을 읽으라는 말씀입니다(웃음). 시간 없으시면 드라마 보셔도 됩니다(웃음).
- 번 아웃을 해결하는 방법이 뭔가요.
= 저는 데일리 루틴은 무조건 지키려고 해요. 그럴 때일수록 밖에 나가야 하고, 움직여야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수영도 하고요. 놀랍겠지만 하고 있는 몸입니다(웃음).
그보다도 근본적으로 초조한 마음을 안 가지려고 하는 것 같아요. 초조해지면 내가 하고 있는 것에 집중하자는 생각을 많이 하고요. 제가 2023년에 굉장히 심하게 번아웃이 왔어요. 고름 난 데 바늘을 찌르는 느낌이었어요.
- 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 배를 탄 여행자로서 어제 굉장히 많은 분들을 지우펀에서 만났는데요. 여행이 어떤 기분이셨는지 궁금합니다.
= 도망치고 싶었어요. 사람 많은 걸 두려워해요. 명동 앞 상점 같기도 하다 싶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 이런 인생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방향성이 있으셨나요.
= 저는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싶어요. 미래의 어떤 시점과 이루고 싶은 것을 사는 것 같아요. 그런 사고의 습관을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의 감각에 집중하자는 생각이에요. 현재의 행복을 찾기 위해서 살려고 합니다.
- <대도시의 사랑법> 영화를 봤는데요. 목표가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셨는데, 비주류 소재를 사용하신 이유가 있나요.
= 돈 벌고 싶으면 평범한 걸 해도 되는데 주류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가 있냐는 거잖아요?
음.. 필요해서 썼어요. 내가 잘할 수 있는 얘기이기도 했고요. 그걸 통해서 상업성을 증명하고 싶었어요.
작년 10월 영화가 개봉했고, 드라마도 오픈했거든요. 다 몰린 거죠. 특히 영화 드라마는 굉장히 상업적인 장르잖아요. 나의 원작 콘텐츠를 통해서 극본을 통해서 그런 성취를 이뤄냈다는 게 기쁘고 행복했어요.
남들 다 하는 얘기는 재미없잖아요. 문학의 본질은 얘기되지 못했던 곳에 마이크를 한 번 더 들이미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고, 5년간 정말 최선을 다했던 프로젝트가 비로소 막을 내린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