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아파서 쉽니다
작성자 allreview
금주의 한-탄
이번 주는 아파서 쉽니다
[2025년 1월 첫째 주]
12월 30일 월요일 새벽, 잠결에 목이 아파서 깼다. 구토가 나왔다. 검붉은 피도 섞여 있었다. 너무 아파서 일단 응급실에 가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새벽 5시에 택시를 타고 고대 안암병원 응급실에 갔다.
응급실에 도착하자, 간호사는 내 상태를 먼저 확인했다. 어디가 아픈지, 언제부터 아팠는지, 기저 질환(언더라잉)이 있는지 등을 체크했다. 천천히 아는 대로 얘기했다. 곧이어 체온과 혈압을 쟀고, 인적 사항을 물었다. 의식은 멀쩡했다.
잠시 어디론가 사라진 간호사는 천천히 걸어 들어와 '지금 당장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날이 밝는 대로 1, 2차 병원(대학 병원보다는 소규모 병원)에 가보라고 권했다. QR코드까지 친절히 안내해 주셨다.
꾹 참고 발길을 돌렸다. 집에 돌아갈 땐 버스를 탔다. 구글 메일에 들어가 차장님, 실장님께 '당일 휴가원을 쓰겠다'며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병가를 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몇 정거장 되지 않아 내렸다. 천천히 집으로 걸어갔다.
집에 돌아가 두 시간 동안 뜬 눈으로 누워있었다. 9시가 되자마자 집 근처 가장 큰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이미 어린아이들로 북새통이었다. 대기 인원은 40명 남짓. 그렇게 큰 병원 대기실에 앉을자리가 없었다. 다른 이비인후과를 찾아야 했다.
15분 여를 더 걸어 다른 이비인후과에 들어갔다. 사람이 많았지만,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또 1시간을 기다려 겨우 진찰을 받았다. 여차저차 상황을 설명했다. 표정이 굳어지던 의사는 먼저 내 목구멍과 코에 카메라를 집어넣었다. "아- 해보세요. (잘 안 보이네..) 이- 해보세요."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구글을 켰다. 조용히 키보드 자판을 타닥타닥 두드렸다. 검색창엔 "Mallory-weiss Syndrome"이 떠 있었다. 구글 이미지엔 온갖 혐오스러운 사진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원칙대로 설명드릴게요. 가끔 대학생들이 MT 가서 술 먹고 죽는 경우 있죠? 그게 다 이거예요. 말로리 바이스 증후군이라는 건데. 위, 식도가 막 찢어지는 거예요. 이유는 다양한데, 구토를 심하게 하면 그래요. 일단 큰 병원 가셔서 검사 받으세요."
".....네?"
"피 나오는 건 무조건 안 좋은 징후예요. 게다가 지금 갑자기 그러니까. 내과 전문의 3명 이상 있는 큰 병원 가세요. 흘려듣지 마시고요. 이거 이대로 내버려두면 죽을 수도 있어요. 여기 근처 xx병원 이런 데 말고. 큰 병원 가세요. 큰 병원. 진료의뢰서 써드릴 테니까."
"......"
"'혈관이 제대로 아물지 않는다면, 재출혈의 위험이 높아진다. 대개 사망률이 높다.' 이거 지금 사전에 써 있는 그대로 읽은 거에요. 보세요."
이전까지 약 1~2분에 환자 한 명씩 처리하던 의사가 유독 내게만 최소 3분 이상을 쏟아붓고 있었다. 이 정도면 나도 대충은 알 수 있었다. 꽤 심각하다는 걸.
수납을 하러 간 창구에서 간호사는 '진료 의뢰서'를 뽑아 들었다. "아, 잘못나왔네. 처방전 드릴게요. 잠시만요."
아니다. 분명히 '진료 의뢰서'가 맞았다. 나에겐 처방전이 아니라 진료의뢰서를 줘야 했다.
1분도 안 돼서 돌아온 간호사는 머쓱하다는 듯이 내게 진료 의뢰서를 건넸다. "봉투는 옆에 있어요"라는 말과 함께.
이비인후과를 나와 고대 안암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여차저차 연결된 상담원은 내 상태를 듣고 일단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교수님 진료를 알아보겠다고 했다. 내가 갔던 병원에서 들은 대로 말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죽을 수도 있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한 30초에서 1분쯤 지나고 내게 말했다. "일단 최대한 빨리 잡아도, 내일 오전 9시 50분이에요. 괜찮으세요?"
"네"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말은 없었다. 딱 봐도 10시 직전에 억지로 나를 끼워넣은 거였다. 감사함과 죄송함이 밀려왔다.
"오실 때 신분증이랑 진료 의뢰서 챙기세요."를 제외한 다른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통화를 마친 시간은 월요일 오전 11시 반이었다. 단 6시간 만에 내게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연구원엔 또 병가를 내고, 약속 몇 개를 취소했다.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진 않았다. 괜찮을 수도 있고, 상황이 나쁘다면 더욱 말하고 싶진 않았다. 부모님에게도 말씀드리진 않았다. 그냥 연말이라서 쉰다고 했다.
하루 종일 목엔 이물감과 통증이 있었다.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일단 물을 계속 마셨다. 잠시 산책을 나갔다가 들어왔다. 목은 아팠고 속은 쓰렸으며 하늘은 깨끗했다.
고대 안암병원 알림톡이 왔다. 등록번호와 진료 시간, 담당 전문의가 배정됐다는 카톡이었다.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31일(화) 오전 6시도 안 되어 다시 눈이 떠졌다. 통증 때문에 잤다 깨기를 반복했다. 9시에 고대 병원에 도착했다.
키오스크로 진료카드를 발급받았다. 촌스러운 주황색과 빨간색으로 내 이름과 등록번호가 써있는 걸 보고야 실감이 났다. 한 가지 생각이 더 늘었다. '죽을 수도 있다. 최대한 빨리 대학병원에 왔다.'
2024년의 마지막 날, 대학 병원은 평화로워 보였다. 클래식 음악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들 사이로 들이치는 햇빛. 매주 수요일마다 열리는 피아노 연주회 안내 문구가 겹쳐졌다. 필요 이상으로 눈이 부셨다.
이비인후과에 도착해 혈압을 재고 나서야 잠시 숨을 돌렸다. TV에선 무안 공항 참사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넋을 놓고 몇 분 동안 뉴스만 봤다. 참사 소식 때문인지 내 상황 때문인지 힘이 없었다.
하지만 교수님은 쾌활했다. 진료 의뢰서를 살펴보고 내 상태를 물은 교수님은 이전과 똑같이 초소형 카메라를 들이밀며 '아'와 '이'를 해보라고 하셨다. '혀를 쭉 내밀라'는 지시에 헛구역질을 몇 번 참고 나서야 헤드라이트를 끄고 말씀하셨다.
내게 딱 두 개를 물으셨다. '지금도 찢어질 듯이 심하게 아프냐'고. '아직도 출혈이 있냐'고. 그게 아니면 괜찮을 거라고 했다. '대부분 자연 치유되니까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대신 '소화기(내과) 쪽으로 가서 위내시경을 하면 조금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건강하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도 잊지 않으셨다.
대학 병원의 협진 시스템에 따라 '소화기센터'에서 진료 예약을 새롭게 잡으라는 안내를 받았다. 손에 들려진 종이만 해도 벌써 몇 장이었다.
한 이분 여를 걸어 도착한 소화기센터 접수창구에선 '위 내시경을 하려면 최소한 한 달 이상이 걸린다'고 했다.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는 없으니, 인근 병원에서 위내시경을 해보는 걸 추천드린다'며 사실상 나를 돌려보냈다.
"네"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말은 이때도 없었다. 처방전도 없이 검사만 받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약간의 안도감과 불안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대신 약국에 들렀다. 할아버지 약사분께 세 번째로 내 증상을 똑같이, 마치 AI처럼, 말했다.
잠시 고민하시더니 약 두 개를 꺼내셨다. 하나는 구토 방지 약, 다른 하나는 가래 빼주는 약. 각각 두 알씩 하루 3번. 8,500원.
- 여기서 먹고 가도 되나요?
- 네
- 감사합니다.
위 내시경을 받기 위해 새롭게 예약을 잡아야 했다. 약 3년 전 건강검진을 받았던 곳에 전화해 위내시경 예약을 받으려 전화를 넣었다.
- 가격이 어떻게 되나요?
- 스탠다드는 50만원이고요. VIP는 80만원인데요. ... 어떻게 해드릴까요?
'미쳤구나. 내가 그 나이에 50만원 짜리 건강검진을 받았었구나.'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 스탠다드로 해주세요. 혹시... 거기에 전문의는 몇 분 계세요?
- 저희 4분 계세요. 진료 원하시는 분이 따로 계실까요?
-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확인차...
이제 난 뭘 해야 하지.
하루 하고도 6시간만에 2024년이 끝났다. 이렇게 끝나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끝났다.
31일(화) 저녁, 부모님은 '그래도 오랜만에 다 같이 모였는데,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서 회한 접시를 떠 오겠다'며 내게 '뭐 먹을 거냐'고 물으셨다.
'괜찮다'고 했다.
진짜 괜찮은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괜찮다'고 했다.
원래 이번 주에 쓰려던 말이 있었다. 꼭 써야 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