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쉬고 있나요? - 인문잡지 <한편>

작성자 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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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쉬고 있나요? - 인문잡지 <한편>

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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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mee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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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상반기 인턴 생활로 생애 처음 '회사 생활'이라는 걸 해보았어요. 모든 게 처음이라 긴장도 높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남은 하반기 동안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리라 다짐했죠. 취업을 언제 하게 될지는 몰라도, 이렇게 생기는 공백기에 확실하게 쉬어줘야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쉴 수 있을 때 쉬어라!'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 '잘' 쉬는 것에 강박을 느끼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제대로 쉬어보겠다며 혼자 치앙마이로 일주일간 여행을 떠났는데, 가서도 허투루 시간을 보내지 않겠다며 일정을 가득 채워 열심히 다니는 제 모습을 보았어요. 쉬는 것조차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던 거죠. 그때부터 '쉼'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빈틈없이 흘러가는 현대사회에서 쉼을 위한 틈을 만들고 있는지 점검해 보고, 진정한 쉼이란 무엇일지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보고 싶었습니다.

잡지와 피크닉을 떠난다고 생각해주세요!

다양한 이들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만나는 데 잡지만 한 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특히, 요즘은 다채로운 주제와 컨셉을 가진 독립 잡지들이 많아 풍요로운 이야기를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쉼'이라는 소재가 다소 광범위한 만큼 다양한 독립 잡지들을 펼쳐보며 쉼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보았는데요. 분야를 넘나드는 잡지들과 함께 진정한 쉼이란 무엇일지 함께 살펴봅시다.


인문잡지 <한편> 14 '쉼'

첫 번째 주자는 인문 잡지 <한편>입니다. 올여름 특별호로 출간된 '쉼' 호를 볼까 해요. <한편>은 '책보다 짧고 논문보다 쉬운 한편의 인문학'이라는 컨셉으로 연 3회 민음사에서 발간하는 잡지입니다. 하나의 주제에 대한 전문가들의 깊이 있는 글을 담고 있어 관심 분야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좋은 잡지인데요. <한편>이 제안하는 쉼에 대한 세 가지 관점을 함께 볼까요?

<한편> 특별호 ‘쉼’

#비우기 - 무용한 시간

가장 공감이 갔던 글은 제일 첫 번째로 수록된 하미나 작가님의 '곧바로 응답하지 않기'였습니다. 비효율적으로 시간 낭비하는 걸 견디지 못했던 작가님은 이제 일부러 '무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해요. 그리고 그 시간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어떤 공간이 비면 새로운 것이 차오르기 마련이다. 반대로 새로운 것이 차오르려면 비워 놓아야 한다.

사람을 좋아하고, 바깥에서 에너지를 얻는 외향형 인간이지만, MBTI는 어디까지나 비율의 문제라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E' 인간이라도 'I' 성향을 일정 부분 지니고 있다는 뜻이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충전해야 밖에 나가 에너지를 사용함과 동시에 얻을 수가 있더라고요. 충전이 되는 휴식 시간은 무용해야 합니다. 쓸모를 따지기 시작하면 그 시간을 '쉼'과 연계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작가님은 쉼을 위한 활동을 '생산성과 관계없이 오로지 순수하게 즐거움을 위한 활동'이라고 정의 내립니다. 몇 가지 예시가 있는데요. '혼자 오랫동안 차를 마신다', '동네에서 가장 석양이 아름다운 곳으로 가서 해가 다 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따위의 것들이에요. 저는 이러한 것들을 보면 '낭만'이라는 표현이 떠오릅니다. 무용하지만 어딘가 충만해지는 기분을 선사하는 그런 순간들을 보면 에너지가 차오르는 기분이 드는 것 같아요.

여기에서 한 가지 유의할 점! '무용한 시간'에 스마트폰을 하는 시간은 포함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생각 없이 SNS 속 콘텐츠를 보며 쉰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실은 계속 들어오는 정보와 그로 인한 자극에 뇌는 쉬지 못한다는 사실, 이제는 많이들 알고 계시는 사실이죠?

#떠나기 - 자유 속에서 얻는 에너지

'도망치는 것도 때로는 도움이 된다'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는 생활근거지에서 잠시 벗어나 쉬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어요. 삶의 의지까지 앗아가 버리는 번아웃을 맞이한 김진영 작가님은 일단 서울에서 벗어나기로 했다고 합니다. 다양한 콘텐츠와 공간, 그리고 여러 사람을 통해 영감을 얻으며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것조차 자기관리의 영역에 놓고 마음 편히 쉬지 못했던 것이죠. 이 대목이 참 공감이 갔습니다. '잘' 쉬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쉬는 데도 힘이 들어가 묘하게 쉬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도망치듯 시애틀로 떠난 작가님은 '방향도 의도도 없이 페달을 굴리다 보니 꺼져 버렸던 엔진에 조금씩 시동이 걸렸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무 살 무렵,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대학 입시를 마치고 소위 말하는 '번아웃'을 겪었습니다. 성인이 되자마자 겪는 혼란함까지 더해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휴학을 하고 '방향도 의도도 없이 페달을 굴리'며 자유로이 도심 속을 누비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그랬더니 자연스레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터리 부족 안내가 떠 있다가 배터리 충전이 완료되었다는 안내가 뜬 순간이었습니다.

소셜 미디어 팔로우 수나 통장 잔고에 찍히는 숫자 너머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 이 세계에서 나의 존재는 어떤 의미인지. 어쩌면 더욱 막막해지지만 동시에 나는 정말로 커다란 세계를 이루는 하나의 개체가 되어 더욱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그 자유로움은 한계 없는 에너지를 준다.

작가님은 여건이 떨어져 시애틀로 떠나셨지만, 꼭 지구 반대편까지 건너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기차를 타고 서해나 동해로, 또 남해로 바다를 보러 떠나고 좋고, 같은 서울이라도 잘 가보지 않은 동네로 가서 시간을 보내보는 건 또 어떨까요? 새로움 속에서 자유를 느끼고, 그 자유가 나에게 집중하게 해준다는 데 크게 공감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동네에서 좀 떨어진 큰 공원에 찾아가 돗자리를 깔고 누워 가만히 공기를 음미하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그러고 있으면 숨통이 확! 트이는 듯해요.

#기르기 - 자연의 흐름 속에서

'비우기', '떠나기'. 두 가지 키워드는 ‘쉼’과 쉽게 연계되는 단어들이죠. 그런데 '기르기'는 비교적 낯설었습니다. 여기서 '기르기'는 농사를 말하는 것인데요. <한편>은 농사일에서 쉼에 대한 인사이트를 어떻게 얻은 걸까요?

밤낮 없는 현대의 노동은 시간과 계절에 대한 감각과 자연에 조응할 수 있는 역량 자체를 뺏어 버리는 것 같아요.

정치학자이자 9년 차 농부이신 채효정 작가님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꼬집습니다. 일과 쉼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짐에 따라 '일상적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추출 당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농사일이라는 건 천재지변의 영향을 많이 받고, 신체 노동이 수반되어 쉽지 않은 작업이죠. 농촌 사회에 스며들어 살아가야 하는 또 다른 차원의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연의 흐름 속에서 회복과 충전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 도시의 임노동과 분명 다른 점이에요. 세상에 고되고, 어렵지 않은 일은 없는데, 소진된 만큼의 에너지를 채울 수 있는 일인지가 중요하죠.

지난 9월, 소개하고 있는 <한편>의 '쉼' 호와 연계된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민음사 맹미선 편집자님의 주도하에 함께 쉼에 대한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직장인 분들이 대부분이었던 두 차례의 모임에서 공통으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쉬는 것에 소홀하다는 점이었어요. 어떤 분은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토로하시기도 했습니다. 어쩐 일인지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듯해 생각이 많아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기르기'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문제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실은 지금 회복이 시급한 건 지구입니다. 산업화 이후 자연에 대한 착취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면서 이제는 그에 상응하는 변화가 피부로 느껴지기에 이르렀어요. 올여름만 해도 스콜성 기후가 된 듯 거센 소나기 비가 자주 내렸었죠. 10월인 지금 모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필요한 재정을 마련할 만큼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주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요.'라는 항꾸네협동조합 활동가 연어 작가님의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연에 조응하는 라이프스타일이 필요한 시점에 이른 것 같다는 생각에서요.


여러분은 충분히 '쉼'을 챙기고 계신가요? <한편>이 제안하는 세 가지 관점 중 유독 와닿는 내용은 없으셨나요? 비우고, 떠나고, 기르는 건 거창하지 않아도 당장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오랜만에 방 정리를 하면서 쓸데없는 물건들을 과감히 비워보고, 살고 있는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새로운 동네로 떠나볼 수도 있겠네요. 작은 식물을 하나 구입해서 정성껏 길러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럼 또 다른 독립 잡지와 함께 다른 ‘쉼’을 이야기하러 오겠습니다. 그동안 모두 쉼을 챙기고 계시기를 바라요. 당장 이번 주말부터요!

여객기 참사 희생자들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