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와 수작의 조건
작성자 하람
나를 위한 내 생각
002.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와 수작의 조건
지난 주말 충무아트센터에서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를 봤다. 학원을 오가는 길 지하철역 광고판에서 보일 때마다 보러 가고 싶었던 뮤지컬이었다. 초연 공연 마지막 회차를 2주 정도 앞둔 상황이라 '라스트 오더'를 쟁취한 느낌이 들었다.
뮤지컬의 줄거리는 단순하고, 어떻게 보면 터무니없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뮤지컬의 원작 소설은 중세 유럽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그린 그림 〈한복 입은 남자〉에서 출발한다. 한복을 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남자의 초상화다. 뮤지컬과 원작 소설은 이 그림 속 남자의 정체가 사실 1442년 이후 모든 기록이 사라진 장영실일 것으로 추측한다. 세종의 명을 받고 이탈리아로 떠난 장영실이 이 그림의 주인공이며 훗날 다빈치의 스승이 되었다는, 어찌 보면 황당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허무맹랑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해서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빈치의 작품에 예수와 성배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줄거리의 〈다빈치 코드〉, 실록에 몇 줄 등장하지 않는 인물 엄흥도와 단종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다룬 〈왕과 사는 남자〉가 그 모범적인 예시다.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빈자리를 상상력으로 메꾸는 것은 관객들에게 이상하고 꺼려지기보다는 신선하고 흥미로운 시도다.
극작품, 그중에서도 팩션 장르의 작품은 관객 설득이 특히 중요하다. 많은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약간의 상상력을 결합해내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 역사를 완벽히 따라가는 정통 사극과 아예 다른 세계를 창작해 그 세계 속의 이야기를 그리는 판타지 작품의 중간 점에 서 있는 '팩션 사극' 내지는 '퓨전 사극'은 호불호가 심하게 갈린다. 사람마다 역사에 허용하는 상상력의 정도가 모두 다르기에 이러한 작품의 평가는 쉽게 양극단으로 갈린다.
여느 작품이 그렇듯 이 작품 또한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 아닌지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이 갈린다. 누군가는 모두가 1인 2역을 맡는 뮤지컬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배우들의 연기력과 노래 실력을 칭찬하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그럼에도 이야기 전개가 너무 비현실적이라 몰입감이 깨졌다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 후자의 입장이다. 극의 줄거리 자체도 '너무 갔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줄거리를 따라가고 몰입하려고 노력하는 데 급급해 극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극의 1막은 조선의 장영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장영실'을 다룬다. 노비에서 종3품 대호군 자리까지 올라간 장영실의 인생을 담는다. 2막은 세종의 명을 받고 떠난 이탈리아의 장영실을 다룬다. 명나라의 정화대장과 함께 이탈리아로 떠난 장영실은 그곳에서 교황청의 음모에 휘말리고 훗날 어린 다빈치를 만나 그의 스승이 된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관객이 당황하고 혹평하는 부분은 2막 부분이다. 난 원작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1막처럼 실제 역사를 다루는 부분이 80%에 달한다고 한다. 하지만 뮤지컬에서는 역사와 상상을 반으로 나눴고 상상의 정도가 너무 심해 버겁게 느껴졌다. 이탈리아에서 지동설을 가르치다 교황청에 공격을 당한다는 내용과 우연한 계기로 어린 다빈치를 만나 그의 스승이 되고 그림 〈한복 입은 남자〉의 주인공이 된다는 내용이 특히 버거웠다.
내가 느낀 이 작품의 단점은 '갈 데까지 간 상상력'이다. 2막에서 장영실은 정화대장과 더불어 동서양을 누빈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역할을 맡는다. 동시에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자리에 서고, 교황청에 의해 탄압받은 또 다른 천문학자 갈릴레이의 운명을 경험한다. 그리고 극의 후반부에 가서는 다빈치의 스승이 되어 15세기 르네상스의 문을 연 선구자 역할까지 수행한다. 장영실이라는 한 인물에 유럽사의 쟁쟁한 인물 4명이 깃들어 있는 셈이다. 한 인물이 너무 많은 인물과 중첩되고, 그 중첩 인물이 모두 뛰어난 인물이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게 뭐야?'나 '이게 맞나?' 식의 반응을 유발한다.
여기서 나의 '수작의 기준' 첫 번째가 등장한다. '단정해야 한다'이다.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나 작품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인물의 설정·행동이 과하면 일단 거부감이 든다. 이 기준에 맞는 작품은 영화 〈세계의 주인〉이다. 사람들이 잘 다루지 않고 우리 사회의 민감한 면을 소재로 삼는 영화임에도 영화 속의 인물들은 당장 내 옆집으로 이사 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한복 입은 남자〉 속 장영실은 너무 많은 설정을 가진 인물이었고, 이 설정을 완벽히 풀어내기에 180분의 시간은 부족했다.
〈한복 입은 남자〉의 아쉬운 점은 장영실의 설정 과잉이 다가 아니다. 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점'을 쉽게 파악하기 어려웠다. 내가 맨 처음으로 생각한 주제는 '핍박받던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면 이렇게 위대한 업적을 세울 수 있다'였다. 하지만 곱씹어 볼수록 이 주제는 적합하지 않다고 느꼈다. 정말 이런 메시지를 주고 싶다면 2막은 굳이 필요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기록된 장영실의 삶 자체로 줄 수 있는 교훈이라 생각했다. 그다음으로 생각한 주제는 '본인들 밥그릇 챙기기에만 급급한 기득권'이었다. 1막에서는 조정의 기존 관리들이, 2막에서는 교황을 비롯한 교황청 인물들이 장영실을 견제한다. 하지만 이 주제도 적합하지 않게 느껴졌다. 장영실에게 수많은 설정을 얼기설기 붙이면서 할만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영실의 설정 과잉을 뒷받침할만한 깔끔한 주제가 생각나지 않았다.
나의 두 번째 수작의 기준은 '또렷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이다. 인물의 설정이 조금 비대하더라도 하나의 현실적인 주제를 가지고 그 주제를 향해 나아간다면 어느 정도 '정상 참작' 된다. 내가 최근에 본 영화 중 이 조건이 전혀 충족되지 않은 영화는 〈프로젝트 Y〉이다. 15세 이상 관람가라는 상영 등급이 무색할 정도로 높은 수위와 서사의 진부함도 관객들의 발을 돌리는 요소였겠지만, 내가 가장 실망했던 부분은 주제였다. 108분 동안 감독이 도대체 어떤 메시지를 던지려 하는지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다. 〈한복 입은 남자〉도 같았다. 180분의 긴 러닝타임 동안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자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세 번째 수작의 기준은 '친절해야 한다'이다. 두 번째 조건과도 연결되는데, 또렷한 주제를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작품이야말로 진정한 수작이라 생각한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해외 독립영화의 흥행이 이어지고 있는 데 반해 국내 독립영화의 흥행 실적은 시원치 않다는 유튜브 영상을 봤다. 영상에서도 한국 독립영화 제작자들의 고지식한 태도를 문제 삼았지만, 댓글은 더 신랄했다. 댓글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단어는 '예술병'이었다. 영화라는 고등한 매체를 제작하고, 그 속에 고급진 메시지를 담는 데에만 열중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고급진 메시지를 빙빙 돌려 전한다는 데 가장 많은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나도 그렇다. 장르를 불문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간단명료하게, 하지만 해야 할 말은 다 하면서 전하는 작품이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한복 입은 남자〉는 너무 불친절했다.
마지막으로, '뛰어난 수작'의 기준도 가지고 있다. 바로 '계속 곱씹어 봐도 질리지 않아야 한다'이다. 설정이 단정하고, 또렷한 메시지를 친절하게 설명해주면서 동시에 관객들이 계속 작품을 곱씹게 하고 건강한 논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은 정말 뛰어난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의 진정한 메시지를 계속 곱씹게 만든다든가, 리뷰·해석 영상을 보고 '이것도 말이 되네', '이렇게도 느낄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 내가 올해 본 영화 중에서는 〈시라트〉와 〈센티멘탈 밸류〉가 이 조건을 만족한다.
〈한복 입은 남자〉는 뮤지컬에 완전히 문외한인 나에게도 아쉽고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다. 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대장치나 넘버 등 뮤지컬에만 있는 요소로 이 작품을 평가했다면, 나는 한 편의 영화를 봤다는 생각으로 이 작품을 평가해봤다. 평가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수작의 조건을 탄탄히 정립시키고, 그 조건에 맞는 영화를 떠올리며 내가 봤던 영화를 상기해 보게 됐다. 분명 최소 2주마다 한 번씩은 내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했는데, 벌써 지난 아티클을 적은 지 한 달이 훌쩍 넘었다. 주기적으로 그리고 꾸준히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노력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