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롤모델 특집]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작성자 우따따
[여성 롤모델 특집]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나답게 사는 삶’은 무엇일까요?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 그리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 일치하는 삶이야말로 ‘나답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살다 보면, 남의 눈치를 보느라 그렇지 못한 순간이 있잖아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요” 웃은 순간, 불편한 순간에도 “아하 네... 감사합니다” 인사하는 날, 다들 있지 않나요? 과거 여성들의 삶에는 이런 억압이 더 강했어요. 솔직한 생각을 표현하면 미움 받을 수도 있고, 모든 것을 빼앗긴 채 굶어 죽을 수도 있었어요.
굶어 죽는 건 좀 과장 아니냐고요?
실제로 주체적인 여성의 권리를 이야기하며
자유롭게 표현하며 살았다는 이유로
굶어 죽도록 방치된 여성 예술가가 있어요.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작가,
주체적인 여성의 자유와 평등을 외친
용감한 여성운동가, 나혜석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유학 시절 일본 최초의 페미니스트 잡지를 통해 여성 해방에 처음으로 눈뜨게 되었는데요. 그는 도쿄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운 후 귀국하여 화가와 작가, 사회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로도 활동했죠.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투옥되기도 했고,급진적인 글을 기고해 화제가 되기도 했어요.
특히 그는 현모양처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보는
한국 사회의 여성관을 비판한 글을 기고해
당시 청년과 문인들 사이에 유명인이 됩니다.
“현모양처는 이상을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할 바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을 장려한 것이다.”
이런 그는 결혼을 하라는 가족의 권고를 거절했고,
화가 난 아버지는 학비 송금을 중단하게 돼요.
이에 그는 휴학 후 여학교 선생을 하면서
학비를 모아 복학하기도 했어요.결혼 후 남편을 따라 해외 여행을 떠나 ‘조선 최초로 유럽과 미국을 여행한 여성’이 되기도 했는데요.
여행에서 나혜석 부부는 모두 외도를 했지만, 전남편은 아무 피해도 입지 않고,귀국 후 나혜석만 욕을 먹으며 이혼을 당하게 됩니다. 그가 길을 지나갈 때 휴지와 돌 등이 날아오기도 했고, 자신의 아이를 보지 못해 괴로워했어요.

그러나 나혜석은 죄를 빌기는커녕 오히려 <이혼고백서>와 <정조 취미론>을 발표해 조선을 발칵 뒤집게 되는데요. 순결과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일 뿐이라고 주장한 거예요. 이는 당시 힘있는 남성 지식인들과 유학자들의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죠. 특히 그는 자신의 아내,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순결함을 요구하면서, 다른 사람의 여성에게 성욕을 품는 한국 남자들의 위선을 비판했습니다.
그는 작품 <인형의 가>를 통해서도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문제를 날카롭게 드러냈어요.
“나는 인형이었네/ 아버지의 착한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착한 아내인 인형으로/ 그네들의 노리개였네 (중략) 남편의 아내 되기 전에/ 자녀의 어미 되기 전에/ 아버지의 딸이 되기 전에/ 첫째로 사람이라네.”
이혼 후 그는 절과 길을 돌아다니며 밥을 얻어먹고
살다가 행방불명되어 실종처리가 되었고, 이후
무연고자 시신 광고를 통해 죽음이 알려지게 됩니다.
여성이기 전에 한 명의 자유로운 인간이길 바라며, 새로운 길로 탐험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 나혜석
더 많은 여성들이 나답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을 바라며, 그의 명언을 따라 적을 수 있는 필사 노트를 만들었어요. 나혜석 서양화가를 포함한 한국 여성 위인 7인의 명언을 마음에 새기는 필사노트가 궁금하시다면? 우따따 홈페이지에서 "여성 명언 필사 노트" 구경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