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제주 4·3 75주기

수학여행부터 신혼여행까지, 우리 제주 여행 참 많이 가잖아요. 그만큼 아름다운 섬이고요. 하지만 그 아름다운 풍경 곳곳이 ‘학살터’였다는 걸 알고 있나요? 오늘은 바로 그 학살이 벌어졌던 ‘제주 4·3’이 일어난 지 딱 75주년이 되는 날이에요.

제주 4·3, 어떤 사건이더라?

1947년부터 약 7년 7개월 동안 벌어진 무력 충돌과 진압으로 많은 제주도민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에요. 차례로 살펴보면:

  • 해방 이후 제주는

  • ‘3·1사건’과 무력 진압

  • ‘빨간 섬’으로 찍힌 낙인

  • 제주를 뒤엎은 학살

해방 이후 제주는

1945년 해방 후, 1948년에 남한 정부가 생기기 전까지 미군이 우리나라를 통치했는데요(=미군정). 당시 제주도에는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정당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어요.

‘3·1사건’과 무력 진압

1947년, 제주에서 3·1절 기념행사가 열렸는데요. 이때 경찰이 탄 말에 어린이가 다쳤는데 아이를 그대로 두고 떠나자 도민들이 강하게 항의했어요. 경찰이 도민들에게 총을 쏴서 6명이 목숨을 잃었고요.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도민 총파업, 남로당의 시위가 시작됐어요. 미군과 경찰은 “좌파 세력의 폭동이다!”라며 무력으로 진압했고요.

‘빨간 섬’으로 찍힌 낙인

1948년, 미국의 입김이 점점 거세졌어요: “남한 사람들끼리라도 선거(=5·10 총선거)해서 빨리 정부 세우자!” 반면 남로당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완전히 나뉘게 된다며 반대했고요.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남로당의 무장 투쟁도 시작됐어요. 그렇게 제주에서 5·10 총선거가 무산되자 미군과 이승만 정부는 대규모 학살 작전을 펼쳤어요. 제주도민 전체를 정부에 반대하는 ‘폭도’로 규정한 것.

제주를 뒤엎은 학살

학살 작전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어요. 당시 제주도민의 10%인 약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약 30%는 어린이·노인·여성이었고요. 이후에도 희생자의 유족과 후손들은 수십 년 동안 ‘폭도의 가족’으로 몰려 감시당했어요.

지금은 어떤 상황이야?

뒤늦게 진상조사와 사과가 이루어졌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요:

  • 천천히 피해 회복이 시작됐지만

  • 여전히 남은 상처들

천천히 피해 회복이 시작됐지만

사건 이후 50년이 넘도록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다가, 2000년에야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시작됐어요. 2003년에 정부가 처음으로 ‘국가 권력에 의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고요. 작년부터는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 방안이 담긴 법(제주 4·3 특별법 개정안)이 시행되고 있어요.

여전히 남은 상처들

당시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군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전국 15개 교도소로 흩어진 도민만 2700명이 넘는데요. 대부분 다시 제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거나 행방불명됐어요. 그때 처벌 받은 기록이 그대로 남아 아직 명예회복을 하지 못한 이들의 정보 등을 조사해야 한다는 말이 나와요. 또, 5·18 민주화운동이 예전에 ‘광주사태’로 불린 것처럼 제주 4·3 역시 아직 공식적인 이름이 없는데요. 명칭부터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제주 4·3,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제주는 지금 4·3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될 수 있도록 힘쓰고 있어요.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국가 폭력 등이 전부 담긴 희귀한 자료여서 의미 있는 데다, 전 세계에 ‘화해와 상생의 정신’을 전하고 싶다는 것. 피해자인 희생자유족회와 ‘가해자’ 쪽인 전현직 경찰관들로 이루어진 제주재향경우회가 지난 2013년, 자발적으로 화해했거든요. 함께 희생자를 기리면서 오랜 갈등을 치유하고 있는 것. 과거사 문제를 해결한 다른 나라를 봐도, 이렇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화해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이미지: ⓒ제주4·3아카이브
#사회#인권#국가폭력#주한미군#제주 4·3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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